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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노랫소리를 위해서

몽몽

알피라, 라크리사



라크리사가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알피라를 지키고 싶어합니다.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좁은 비탈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조심 좀 하라는 짜증스러운 소리들이 주변에서 들려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중간에 신발이 벗겨져 넘어질 뻔했지만 다시 주워 신을 새도 없이 달렸다. 가장 빠른 길은 드루이드들이 막고 있어서 갈 수 없었다. 해변 가까이로 빙 돌아 다시 바윗길을 따라 위로. 그리고 곧 간절히 찾고 있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늘 중요한 부분에서 틀리던 류트 가락과 가사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해 툭 툭 끊기는 목소리. 머나먼 기억 속 리할라에게 늘 지적당하고 본인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나에게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거기서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알피라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알피라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는 않을 거리에 하염없이 멈춰 서서 노랫소리를 들었다.


 아직도 나에게는 알피라의 비명소리가 머릿속에 선명했다. 튀어 오르는 피의 감촉이 아직도 끈적하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들은 전부 없던 일이 되었다. 알피라는 여전히 바로 저기에 상처 없이 앉아 있고, 내게 들려오는 것은 비명이 아닌 노랫소리이다. 지난밤 내가 겪었던 일들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것에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허무함과 혼란, 무력감이 섞여 요동쳤다. 엘리시스 18일, 또다시 오늘. 나는 수도 없이 맞이했던 아침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나는 티플링이라는 이유로 엘터렐에서 쫓겨나 발더스 게이트를 향하고 있는 난민 무리에 속해 있는 평범한 청년이다. 그런 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은 라크리사다. 이 이름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길을 나설 때마다 몇 명씩 허무하게 죽어 나간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공간 또한 그리 안전한 공간은 아니었다. 가만히 멈춰 쉬고 있는 동안에도 여러 번의 습격을 겪었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수는 더 줄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수많은 허무한 죽음들이 다시 돌이켜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성직자들의 부활 주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이를 다시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었던 시간이 다시 돌이켜지고 있다.


 내가 겪었던 첫 번째 ‘돌이킴’의 기억은 달오름탑의 지하감옥에서 겪었다. 드루이드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길을 막고 버티고 있는 사나운 고블린들도 무사히 견뎌내고 이겨내어 다시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우리들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발더스 게이트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적인 기대를 말하는 이들도 늘어갔다. 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이전에 겪었던 것보다 더한 고난이었다. 짙은 그림자에 점령된 땅은 그곳을 지나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적대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절대자의 군대가 우리를 덮쳤을 때, 믿고 의지하던 헬라이더는 손에 든 무기를 놓아버렸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하던 사이에 나를 포함한 몇몇은 달오름탑이라고 불리는 장소의 지하로 끌려갔다. 단단한 창살과 감시의 눈 아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하나둘씩 감방 동료들이 사라지고 내 차례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할 때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손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것은 알피라의 노랫소리였다. 알피라와는 막상 엘터렐에서는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이였다. 이 여정을 시작했을 때, 드루이드들의 숲에 있었을 때도 비슷한 또래라는 접점 덕분에 남들보다 몇 번 더 말을 나누어 봤을 뿐인,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아직은 약간 어색한 사이였다. 그저 언젠가부터 나 혼자 남몰래 알피라의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을 키워왔을 뿐이었다. 그것이 여기까지의 기나긴 행군을 지나오면서 바뀌었다. 얄궂게도 알피라의 스승인 리할라가 죽은 뒤였기에 곁에 설 수 있는 자리가 났다. 죽은 이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으니 나 또한 죽게 되는 걸까?.


 알피라는 제대로 대피할 수 있었을까? 혹은 그 자리에 홀로 남겨져 그림자 저주에 먹혀버렸을까? 어쩌면 감옥으로 잡혀 들어온 나의 명줄이 더 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알피라가 무사히 도망쳐서 안전한 장소를 찾았기를. 그저 그렇게 기도하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사무치는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상념이 이어지는 사이에 기어코 내 차례가 다가오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혹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음 순간 엘리시스 18일, 드루이드의 숲 동굴 안에서 눈을 떴다. 처음에는 전부 꿈인 줄로만 알았다. 길고도 암울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몬이, 제블로어가 꿈에 나왔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고, 꿈속과 꼭 같은 문제 때문에 드루이드들과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엄청난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되돌려졌고, 나는 그 기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기억을, 지식을 활용하면 우리 모두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위험을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곧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에서 위험만을 미리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블린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미리 알고 있어 봤자 그들과 맞서 싸울 힘이 없다면 소용이 없었다. 그림자 땅에서 위험이 닥쳐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 봤자 절대자의 신도들과 싸워 이길 힘이 없다면 소용이 없었다. 나는 몇 번의 여정과, 죽음과, 그리고 돌이킴을 더 겪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전보다 더 짙어진 무력감뿐이었다.


 그렇게 소득 없는 반복을 거듭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이 반복의 중심은 내가 아닌 게 아닐까? 내가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저 단순한 오류라면? 주인공이 따로 있는 거라면? 반복을 거칠 때마다 눈에 띄게 변하는 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자들이 정말 ‘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심이 거기라는 것은 확실했다. 이 반복이 시작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여행자들의 무리. 그들의 리더.


 여행자들의 리더는 매 반복마다 달라졌다. 그들 무리의 구성원은 대체로 늘 비슷했지만 리더만큼은 확실하게 달라졌다. 아예 새로운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고, 때로는 구성원들 중 한 명이 리더를 맡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우리들의 운명 또한 결정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도와 고블린들을 무찌르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살았다. 그리고 그들이 고블린들을 도와 우리를 학살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죽었다. 혹은 그들이 달오름탑에 붙잡혀 있는 우리들을 구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살 수 있었고, 그들이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처음 이 사실을 인정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우리 종족의 운명과도 같지 않나? 티플링들은 악마와 직접적으로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 힘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모습만은 악마를 닮아 모두에게 배척받는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저지른 일의 부작용으로 평생을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 꼴은 어떤가? 다른 누군가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반복에 휩쓸려 기억만을 가지고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우리의 상황을 바꿔보려 노력하는 것을 그만두고 여행자들의 리더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 점쳐보는 것에만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 여행자들이 우리가 머무르는 곳에 도착하고, 제블로어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자가 조금이라도 내가, 우리가 살 수 있을 거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 내기를 제안했다.


 “정말 그렇게 확신한다면, 내기라도 하지 않을래?”


 “네가 죽으면 판돈은 어떻게 받으려고?”


 여행자들의 리더는 미심쩍은 듯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쾌활한 기색으로 말했다.


 “다 알면서 뭘 물어? 내 시체에 넣어줘. 입구에서 활약하던 걸 보니 우리보다는 명줄이 길 거 아냐.”


 큰 의미는 없는 작은 유흥이었다. 고작 10골드. 고작 그 정도라도 우리의 생존에 걸어볼 의향이 있을지 떠보기 위한. 그렇게 적중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난번 반복에서 만났던 여행자들의 리더는 나의 생존에 10골드를 걸었지만 바로 다음 날 고블린과 드로우를 이끌고 우리를 학살하러 왔다.


 여행자 무리가 다시 길을 떠난 후, 한동안 망루를 지키던 나는 해가 질 때쯤 10골드를 가볍게 튕기며 내려가 알피라를 찾았다. 아직은 반복 속의 기억에서 몇 번 그러했던 것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여행자들의 방문을 핑계로 말이라도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멀리서 목소리만 듣는 것으로도 괜찮았다. 이번에는 며칠이나 더 목숨을 유지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전에 그 노랫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알피라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늘 노래 연습을 하던 나무 아래에도, 숙소에도 아무 데도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아도 알피라의 행방을 정확히 아는 이는 없었다. 짐을 챙겨서 동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는 목격담만 하나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떠난 것일까? 알피라의 스승인 리할라가 죽은 후 알피라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비슷한 사건들이 흘러가고 되돌아간 시간 속에서 눈을 다시 뜰 때까지 나는 알피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 날들이 수없이 많은 반복 속에 몇 번인가 섞여 있었다. 그 어떤 습격도, 소란스러움도 없이 알피라가 사라진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이미 각자의 불안과 위험을 안고 있는 동족들은 스승을 잃은 후 늘 외딴곳에서 홀로 노래를 부르던 젊은 바드 한 명에게 큰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오직 나만이, 아직까지는 그저 홀로 멀리서 지켜볼 뿐, 연인은커녕 친구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나만이 너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래, 너. 알피라. 몇 번이고 관계가 과거로 돌아가기에 너는 또다시 나를 어색한 눈길로 바라보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눈길을 뗄 수 없었던 나의 사랑. 몇 번이고 너를 다시 만나고, 너의 노랫소리를 듣고, 너에게 말을 걸고,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또 네가 죽는 모습까지 지켜보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의 마음만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어떻든, 그리고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고 시간은 흘러가고, 또 다시 돌아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네가 사라지는 일은 여행자들의 리더가 가진 성향과는 관계없이 발생하는 사건처럼 보였다. 그들이 아주 악독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너는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기도 있었고, 그들이 아주 선량하게 행동할 때에도 간혹 너는 홀로 사라졌다.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 어떤 것이든 스스로 행동하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던 나였지만 이것만큼은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네가 죽는 모습은 몇 번이나 봐왔다. 우리 티플링 난민 무리는 몇 번이나 몰살당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적어도 모두가 함께였다. ‘우리’가 습격당했기에 네가 죽었고, 내가 따로 떨어져 죽는 바람에 마지막을 확인하지 못한 때에도 다른 난민들과 함께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우리가 모두 무사히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할 때에도 너는 함께하지 않았다. 오직 너만 없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어차피 내 기억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살아남는데 너 혼자만 사라지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너 없이, 너의 노랫소리 없이 그 길고 어두운 길을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너를 몇 번 더 잃고, 너의 부재를 몇 번이나 더 견디고, 너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아가면서도 처음부터 너에게 살갑게 말을 걸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네가 사라지는 날에 어디로 가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너는 여행자들의 야영지를 찾아가겠다고 말한다. 자신도 모험가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며 떠난 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너를 따라 나도 함께 여행자들의 야영지로 따라갔다. 너는 내가 너를 따라가겠다는 말에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안심하는 듯이 보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여행자들은 힘든 여정이 될 거라고 겁을 주면서도 우리를 받아들여 주었다. 환영해 주는 듯한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고, 모두가 잠이 들 시간이 되면.




 엘리시스 18일, 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다시 눈을 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마지막의 상세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너와 함께 조용한 야영지에서 작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던 것까지는 기억했다. 하지만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래, 여행자들 중 하나가, 무리의 리더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말을 걸기 위해 다가오는 건가 싶었다. 잠에 취해 멍한 눈을 비비며 눈을 떴을 때 너는 이미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 그 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너의 몸이 쓰러졌다. 피가 튀었다. 피 냄새. 피 냄새가 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익숙해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냄새. 그리고 이제 와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해진 그 냄새였다. 피냄새가 나는 액체는 곧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나의 얼굴에도 축축한 것이 쏟아지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 너를 향해 몸을 던졌나? 어느 쪽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나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기도 전에 죽은 것 같으니.


 또 다시 모든 것이 되돌려진 아침, 식은땀에 젖은 채로 눈을 뜨며 생각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였을까. 여행자들의 리더. 그 자의 성향만 제대로 파악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내가 파악할 것도 없이 그 자에게 우리 모두의 운명이 달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가 선한 자라면, 우리를 돕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혹은 관심을 가지도록 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은 대체 뭐지? 그는 분명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난밤에 보았던 그의 눈빛은 내가 낮에 보았던 것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너를 마치 짐승처럼 찢어발겼다.


 내가 너를 따라가지 않았던 수많은 반복 속에서, 너는 늘 그렇게 죽었던 걸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번에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하나? 다음에 나타날 여행자들의 리더는 어떤 이일지 점치며? 그의 눈치만을 살피며? 그런 고민 속에서도 습관처럼 네가 있을 언덕길을 올랐다.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네가 노래하고 있는 곳으로.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너에게 나의 모습이 보이기 전에 걸음을 멈춘다. 그저 흙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또 다시 시간은 흐른다.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조금씩 다른 일들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집요하게 너를 따라다닌 덕분에 네가 여행자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여행자들의 리더는 강했다. 그들 모두가 강한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자는 유별날 정도였다. 내가 너를 따라간다고 해서 구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그 자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어서 너를 진정한 동료로 받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어떤 생각보다도 먼저 나의 입은 너를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힘없이 쓰러지던 너의 모습도, 사방으로 번지던 너의 혈향도, 이제 지긋지긋해서.


 그리고 다시 엘리시스 18일. 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눌러 삼키며 눈을 떴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절망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는 놀의 습격을 받는다. 고블린들은 어김없이 몰려오고, 드루이드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소름 끼치는 어둠은 지친 걸음을 힘겹게 내딛는 우리들을 유혹하듯 손짓하고, 절대자들의 군대 앞에서 우리의 지도자는 무기를 손에서 놓는다.


 너는 내 눈 앞에서 죽기도 하고, 나는 여전히 너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로 홀로 눈을 감기도 한다. 내가 슬퍼하든, 절망하든, 무력감에 몸부림치든 시간의 흐름은, 그리고 반복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나는 그저 작은 오류로 인한 목격자일 뿐, 절대 모든 일의 주인공은 될 수 없다는 듯이. 그저 주인공이, 시대의 강자가 내리는 선택에 의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흔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듯이.


 시간은 나를 내버려두고 빠르게 달려나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그저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래, 나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깡!


 거대한 쇳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오늘 나는 망루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 대신 아래에서 연습용 표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샤라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언제 이렇게 연습을 많이 한 거야? 이 정도면 여기 민간인 출신 중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겠어.”


 그럴 만도 했다. 아샤라크에게는 고작 사흘 정도가 지났을 뿐이겠지만 나는 수없이, 정말 수도 없는 날들을 반복했으니까. 나는 아샤라크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면 노련한 여행자들 상대라면 어떨까?”


 “여행자들?”


 “지난번 입구 앞에서 고블린들과 싸웠던 여행자들 말이야. 어때?”


 “아, 그 강한 여행자들 말이지. 뭐, 지금은 힘들겠지만 이 속도라면 언젠가 동등해질지도 모르겠어. 정말 재능이 있어 보이는 걸.”


 나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직은 안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포기해도, 실패해도 어차피 모든 것은 다시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표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연습용 표적은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있었지만 검의 움직임은 마치 움직이는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했다.


 검을 휘두르며 어제 만났던 여행자 무리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그들의 리더를 떠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겉보기에 그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인물로 보였다. 난민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그들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겠다고 했다. 알피라를 만나서는 함께 류트를 연주하며 곡을 완성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검을 바로잡고, 다시 있는 힘껏 표적을 내리쳤다. 그 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선량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번에 만나는 자가 아니라도 결국 언젠가 알피라를 죽이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수없이 겪었던 그날 밤의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


 그 자가 너를 죽이는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그는 원래 직업이 무엇이든 너를 죽일 때만큼은 그저 짐승처럼 맨손으로 찢어발긴다. 나는 그 움직임을, 전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보았으니까. 너의 죽음을, 나의 고통을, 그 자의 죄를.


 “라크리사! 지금 바빠? 나 이제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네가 있었다. 노랫소리 만큼이나 어여쁜 목소리. 아직은 나를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모습까지 사랑스럽게 보였다. 이번에도 또 네가 죽는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


 “아니! 마침 오늘은 끝내려는 참이었어. 나도 미리 짐 챙겨뒀으니까 같이 가자.”


 “같이 가주겠다고 해서 고마워. 사실은 조금 불안했거든.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으음, 나도 너처럼 검술 연습을 좀 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아니, 너는 바드잖아. 바드의 장점은 근접전투에서 오는 게 아니거든! 너는 너의 방식대로 더 빛날 곳이 있어.”


 그럴 수 있도록 내가 지켜 줄게. 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아직 단 한 번도 지켜본 적 없는 다짐이었다.


 “아하하, 그런 식으로 말해주는 건 너 밖에 없을 걸! 오늘은 기어코 옆에 있던 다람쥐가 도망가버렸어. 나는 게네들이 나를 응원해주는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다람쥐들이 음악을 뭐 알긴 하겠어? 내가 듣기에는 아름답기만 한데.”


 우리는 평범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잡담을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험가들의 야영지에 도착하고 나서는 다시 다 아는 이야기들이다. 너는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몇몇 동료들이 걱정스럽거나 의심스럽다는 듯한 말을 몇 마디 건네지만 그들의 리더가 곧 승낙한다. 우리는 야영지 한 켠에 함께 머무른다. 해가 질 때까지 다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는 먼저 잠이 든다. 나는 조금씩 편안해지는 너의 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어둠 속을 응시한다.


 약속한듯이 짐승처럼 빛나는 눈을 한 그 자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자에게 말을 거는 어리석은 시도는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아침에도, 그 전날에도, 그리고 이제는 없는 일이 되어버린 그 수많은 반복 속에서도 휘두르고 내리쳤던 그 검을 손에 쥐었다. 


 모든 것은 의미 없는 짓일지 모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너와 우리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할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또 많이 죽는다. 하지만 설령 스쳐지나는 죽음에 불과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더이상 그저 목격자로만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달려드는 그 짐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여러분의 소중한 감상은 참여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