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에서 숱한 위기를 견뎌왔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좀 심했었다. 갑자기 길거리에 일리시드들이 득실거리며 발생하지를 않나 하늘에는 커다란 뇌가 떠다니지를 않나. 순간 드디어 세상에 종말이라도 왔나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영웅들이 해결해 줬다. 그랬다고 했다. 어차피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일개 티플링에게는 그런 건 다 먼 이야기였다. 제퍼는 우선 엉망진창이 된 가게의 마당이나 정리하는 게 급했다.
“이번 영웅 중에는 뱀파이어 스폰도 있다던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거렸다. 떠들썩한 가십거리는 듣기 싫어도 억지로 들려오기 마련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제퍼, 이거 봤어?”
꼬마에게 신문이라도 사 온 건지 호들갑을 떠는 그의 애인, 켈타르는 그의 옆에서 헤드라인을 신나게 읽어대기 시작했다. 제퍼는 잔해들을 치우다 말고 삽을 턱 하니 땅에 박아 삽자루에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쫑알거림이 일찍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영웅 중에 티플링도 있대! 무슨 사연이 있어서 곧바로 아베르누스로 가는 바람에 승리 기념 연회에는 못 온다고 되어있지만… 아 게다가 레이븐가드의 대공 아들도 머리에 티플링처럼 뿔이 자라났다더라! 그 티플링 영웅과 같이 아베르누스로 갔대.”
“하, 또 시작이네.”
제퍼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켈타르는 헉 숨을 들이켜고 입을 닫았다. 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제퍼의 신랄한 조롱이 이어졌다.
“그래. 이번 영웅 중에 티플링이 껴있다니 우리 티플링들에게는 아주 좋은 일이겠네. 나쁜 편견이 사라지는 데 참 기여가 되겠어. 그다음 이야기는 안 봐도 뻔하지만 말이야. 티플링 영웅이 아베르누스로 갔다고? 역시 티플링들은 생긴 그대로 악마랑 연관된 게 맞단 말이지. 게다가 대공 아들의 머리에 뿔이 자라났으니까 분명 사람들은 그걸 ‘불길한 징조’로 생각할 거야. 어쩌다 그런 ‘저주’를 받게 됐을까? 그 저주를 태어날 때부터 받고 멀쩡히 자란 내가 있는데도 말이야!”
하여간, 안 그래도 티플링 난민들이 떼거리로 들어와서 힘들어 죽겠는데 이젠 지옥으로 간 티플링 영웅이라니! 우리 종족이 유명해져서 뭐 어쩌라고, 더 돌만 맞으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비아냥거린 제퍼의 한탄이 끝나자, 적막이 찾아왔다.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말할 건 없지 않냐고 항의할 수도 있었지만, 켈타르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켈타르는 제퍼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막상 비아냥거리고 나니 자신도 머쓱해졌는지 제퍼는 괜히 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티플링 영웅이 생겼다는 건 멋진 소식이었고 그걸 알려주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온 애인이 귀엽다는 사실은 맞았으니까. 때마침 밖에 티플링 아이들이 뛰어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봐라, 난 영웅 카를라크다!”
‘영웅 놀이’라고 네더브레인을 물리친 영웅들의 역할을 하나씩 맡아서 노는 연극 놀이가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인 모양이었다. 그런 걸 보면 티플링이 이입할 수 있는 유명한 영웅이 있다는 게, 특히나 자신과 다르게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앞날에는 더욱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제퍼는 꼬리를 휘적거리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뭐. 티플링 영웅이라니, 멋있네.”
켈타르의 얼굴에 화색이 된다. ‘거봐! 이름은 카를라크라고 자리엘 티플링이래. 큰 도끼를 들고 휘두르는 모습이 전장에서 엄청 멋있었다고 하던데…!’ 옆에서 재잘거리는 켈타르의 얘기를 반쯤 흘려들으며 제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웅 하나가 등장했다고 해서 티플링의 삶이 극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제퍼는 밖에서 ‘카를라크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여기 언더다크에서도 영웅들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무려 뱀파이어 스폰의 신분으로 주인을 물리치고 자유의 몸이 된 하얀 머리의 뱀파이어 스폰 영웅은 아니고. 그 옆의 같은 스폰 형제이자 티플링인 아우렐리아와 그런 영웅들의 전투를 도와주었던 티플링 제블로어 사이에서 말이다. 아스타리온이 아니라 자신을 찾았다길래 아우렐리아는 안 그래도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제블로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티플링 종족인 스폰들의 가족을 찾아주고 싶으시다는 거죠?”
“아시다시피 우리 티플링들은 종족 특성상 차별받는 만큼, 우리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공동체가 어느 정도 설립되어 있으니 거기서 수소문을 하면 티플링 출신의 스폰들은 가족이나 지인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우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리온 덕에 풀려난 7천여 명의 스폰들 중에 티플링 종족의 비율은 꽤 높은 편이었다. 어쩌면 차별이 더 심했을 발더스게이트의 백년도 넘은 과거에 그들이 밤거리로 내몰려 희생양의 타겟이 되기 쉬웠던 건 당연한 결과기도 했다.
“티플링 공동체라…….”
그리고 그 시절에 같은 이유로 스폰이 되었던 아우렐리아는 자신의 기준에서는 새파랗게 어린 후배인 제블로어의 말을 곱씹었다. 제블로어는 그런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원한다면 ‘아우렐리아’를 알고 있는 자가 있는지도 수소문해 줄 수도 있네.”
아우렐리아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티플링의 수명이 얼마나 긴지는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 아스타리온과 비슷한 시기에 스폰이 된 아우렐리아를 기억하고 있을 이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령 기억하고 있다 해도 티플링이라는 괴물에서 더한 괴물이 된 뱀파이어 스폰을 반겨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슬픔은 거기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아우렐리아는 아직 비어 있는 명단을 머뭇거리다가 매만지며 말했다.
“제가 아직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저 저들에게 저는 잔혹한 가해자일 뿐이니까… 그런 제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종족이 같다는 이유로 도움의 손길을 내어봐도 괜찮은 걸까요?”
제블로어의 제안을 수락하기 위해서는 아우렐리아가 직접 유혹해 뱀파이어의 먹잇감으로 바친 이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들을 유혹했을 당시 아우렐리아는 서로가 같은 티플링이라는 친밀감을 이유로 약점을 잡았던 적이 꽤 많았었다. 그런 이들에게 과연 같은 티플링 식구끼리 잘해보자며 말을 거는 뻔뻔한 짓거리를 해도 되는 걸까. 아우렐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제블로어는 변함없이 올곧은 목소리로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 누구도 가지고 태어난 걸 이유로 차별하면 안 되지. 그건 자네에게도 적용되는 말일세.”
아우렐리아는 티플링으로 태어났고, 뱀파이어 스폰으로도 두 번째 태어남을 얻었다. 둘 다 아우렐리아가 정할 수 있던 삶의 시작이 아니었기에. 제블로어는 이에 공감해 주었을 뿐이었고 아우렐리아는 그 공감에서 편안함을 얻었다. 아우렐리아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정리해서 가져다드릴게요. 찾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 많은 티플링 스폰들의 수를 다 세어보고 이름에 특징까지 적어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우렐리아는 아마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었다. 제블로어는 그의 승낙에 기뻐하며 악수를 청했다. 내밀어진 손을 보던 아우렐리아는 머뭇거리다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악수 속에서 피어난 건 유대감이었다.
“라크리사! 거기 다 준비됐어?”
“응 알피라. 이것만 달면 돼!”
그리고 또다시 여기, 제블로어와 함께 고난과 역경을 버티고 발더스 게이트에 무사히 자리를 잡은 또 다른 티플링들이 있었다. 작고 허름하지만 깔끔하게 청소한 오두막 안에 ‘축 알피라 바드 학교 건립’이라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그 플랜카드 옆을 풍선으로 꾸미던 라크리사는 형형색색의 장식들에 만족하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우리 왔어!”
“세상에, 칼! 리아!”
문을 열고 들어온 또 다른 친구들에 알피라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축하 케이크를 들고 알피라의 바드 학교를 응원해 주었다. 비록 아직 수강생은 아무도 없었지만 알피라의 꿈만큼은 그 누구보다 컸다.
“롤란 걔는 바쁘다고 나중에 온다더라. 뭐 그놈의 위저드 탑에 쌓인 책들을 정리하려면 바쁘시다나?”
하하 호호 웃으며 모인 티플링들. 그 모습은 마치 에메랄드 숲에서의 일들을 떠올리게 했다. 고블린들에게 쫓겨 겨우 도착한 곳에서는 드루이드들이 내쫓으려고 하지를 않나, 고블린들은 시도 때도 없이 습격해 와서 지금처럼 빵이나 풍선을 가지고 노는 평화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버텨낸 그들의 미래는 어떠한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희망은 언제든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에 답을 해주듯 파티 준비가 한창이던 그들 사이로 새로운 방문객이 찾아왔다.
“저… 여기가 바드 학교 맞나요?”
“어머! 네, 네 어서오세요! 신문에 광고 냈던 게 벌써 소문이 났나 보네요.”
티플링들 사이로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이는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그는 알피라의 환대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무리에 끼어들었다. 티플링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은 자칫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었으나 그들은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저희가 지금 파티 준비를 하고 있어서. 아참 입단 신청서 드려야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하, 네.”
알피라는 설레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색하게 웃던 수강생은 알피라가 내밀어준 신청서를 성실하게 작성했다. 작성하면서 연주하고 싶은 악기는 무엇인지, 어디서 광고를 보고 이 학교에 왔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얘기도 나누었다. 다 써진 신청서를 본 알피라는 재빠르게 글을 읽었다.
“흠, 흠. 그러니까 켈타르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앞으로 잘 지내보아요! 켈타르와 알피라는 그렇게 악수하고 성공적으로 바드 학교의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물론 그건 그거고 파티는 파티대로 준비해야 했기에 켈타르는 오자마자 수업 대신 파티 준비부터 하게 되었다. 열심히 케이크 세팅을 돕던 그에게 라크리사는 우쭐대며 알피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우리 알피라, 무려 영웅들과 함께 싸운 적도 있는 친구거든요.”
“정말요?”
혹여나 알피라의 실력을 의심할까 봐 띄워주기 위해서 말한 건데 예상보다 켈타르의 반응이 너무나도 좋았다. 요즘 영웅들의 이야기가 발더스 게이트에서 인기라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수줍게 웃으면서도 부정하지는 않던 알피라에게 켈타르는 눈치를 보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저… 그러면 혹시 카를라크도 만나셨나요? 저희 애인이 좋아해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시선을 교환하던 티플링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 띈 미소와 함께 알피라는 자랑스럽게 외쳤다.
“당연하죠! 우리 티플링의 영웅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