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모두가 그걸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도시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모두가 그걸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네더브레인과의 전투로 인해 성의 꼭대기가 전부 날아가고 최상층 그 바로 아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는 구조가 겨우 남은 방이 서재가 되었다. 그곳에는 사방으로 창이 나 있어 도시의 전경을 훤히 볼 수 있었는데 윌은 그중 동쪽으로 난 창문을 자주 찾았다. 윗도시와 아랫도시는 물론 성벽 바깥까지도 내려다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또 유리를 부수려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도시를 구경하던 그를 플로릭이 상념에서 깨웠다. 윌이 무안한 듯 제 이마에 난 뿔을 문지르며 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웜바위 요새에 좀 더 자주 들러야겠어요. 여기서는 리빙턴이 잘 보이질 않네요.”
“윗도시 귀족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그들이 도시의 중앙이 바뀌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걸 잘 알잖아.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널 헐뜯을 거야. 가뜩이나 대공 책봉에 있어 불만이 많은데 책잡힐 구실조차 내주지 말게.”
거침없이 쏘아대는 조언에 윌은 골머리를 앓다가도 상하관계가 뒤바뀌어도 변함없는 플로릭의 태도에 위안을 얻었다.
“압니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렇다면 앞으로 입을 더욱 조심해야 할 거다. 대공이란 자리는 사적으로 한 말도 책임져야 하니까.”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더가 서재로 들어서며 대화에 합류했다. 그는 서류를 가득 안고 있었는데 이는 일리시드 침공 이후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발생한 사건과 사고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 수가 많아 얼더가 용병대를 관리하면서 한 번 거르고 윌에게 보고했다. 플로릭이 재정 문서까지 전달하고 나서야 회의가 시작됐다.
“윗도시 재건 상황은 어떻습니까?”
“조세에 대해 귀족들의 반발이 커. 도시 복구 비용이라고 설득했는데도 기대했던 금액의 절반도 못 모았고.”
“도시가 멸망하더라도 재산 끌어안고 죽을 양반들이야. 내가 용병대에 직접 수금하라고 이르지. 그것 말고는?”
“다른 건 순조롭습니다. 상점가와 주택가로 통하는 도로가 완공된 후에 물자 운반이 원활해져서 예상보다 빠르게 복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임시 주거지를 더 지어서 많은 인원을 도시 안으로 들여올 수 있었고요.”
“좋은 소식이군. 아랫도시도 비슷한 상황이야. 항구 부두가 재건되어 수교를 맺은 도시로부터 들어오는 구호 물품이 늘었어.”
“다행이네요. 그것마저 모자면 더 먼 도시로 원조를 구하러 가보겠습니다. 외교는 아직 미숙하지만요...아버지께 많은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얼더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격한 표정으로 “대공은 그런 약한 소리를 하는 거 아니다.”라며 그의 아들을 다그쳤다. 윌이 자신 없다는 듯이 웃었다.
동료의 말을 계기로 대공이 되어 발더스 게이트 시민을 구하겠노라 맹세했지만 윌은 이따금 그 의무가 부담스러웠다. 그때마다 변경의 검 시절을 그리워했는데 몸은 힘들었을지라도 적을 베고 시민을 구한다는 정의는 단순하고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달리 정치는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타협을 위해 결정권자는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윌은 대공이 된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특히 그의 이마에 난 뿔을 의식하면 더더욱.
“외부 도시에서는 신고가 급증했네요. 대부분 징발된 곳간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이었고요. 용병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인력이 부족해 연루된 자들을 겨우 구금만 한 상태야.”
도시가 팽창하면서 지역의 경계는 희미해졌으나 시민의 경계는 공고해졌다. 시민의 범위는 점점 좁아졌고 밀려난 도시 바깥 거주민은 모자란 수급품을 두고 다투었다.
“지원이 늘어나면 수그러질 거야.”
위로를 겸한 플로릭의 낙관적인 전망에 윌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검문소를 지날 당시를 떠올렸다. 그들을 막았던 건 성벽이 아닌 도시를 지키겠다는 신념이었다. 지옥의 흔적을 힐난하고 거부했던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고 역병처럼 떠돌았다. 이를 엄벌하려는 것처럼 피해자 대부분은 뿔에 상처를 입거나 화상을 입었다. 원인은 더욱 깊은 곳에 있었다.
“그래도 살인으로 번지면 안 되니 경계 인원을 늘리죠. 임금을 높이면 자원입대하는 자도 많아질 겁니다.”
뿌리는 못 뽑고 잔가지만 쳐내는 미봉책에 윌은 혀끝에 남은 씁쓸함을 힘겹게 삼켰다. 마법이나 칼이 아닌 그들을 지킬 방법이 필요했다.
다른 문제로 넘어가려던 도중 문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려 해도 대화가 안 들릴 정도여서 회의가 중단됐다.
“두 분은 쉬고 계세요. 제가 나가보죠.”
회의에 지쳤던 윌은 소음을 핑계 삼아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문 뒤에는 석조로 된 긴 복도가 나 있었는데 커튼이나 카펫으로 덮여있지 않아 소리가 퍼져 나가기 좋았다. 그 때문에 소리의 근원지는 서재와 상당히 거리가 있었는데도 크게 들렸다.
“급하다고요! 오래 안 걸릴 테니까 윌과 만나게 해줘요!”
“대공께서는 용무가 바쁘신 관계로 따로 일정을 잡은 후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경계 서던 병사와 실랑이를 벌이는지 앳된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윌은 몸을 굽혀 시선을 낮췄다. 병사 다리 사이에서 작은 발이 동동 굴렀다. 도망치고 싶지만 버텨야 할 때 에메랄드 숲에서 아이들이 보이던 습관이었다.
“실피!”
반가운 마음에 윌이 이름을 부르자 실피가 병사를 제치고 달려와 윌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뒤따라온 병사가 못마땅한 눈길로 그를 내려보다가 윌과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막무가내로 들어온 터라 곧 쫓아내겠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해결하죠.”
병사가 사라지고 나서야 실피는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위협적인 상황에서 느꼈던 두려움은 사그라지지 않는지 윌의 옷 끝을 잡고 떨었다. 윌이 그 손을 잡고 복도 양 끝을 오가며 둘 말고는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실피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윌, 도와줘요. 메티스가 잡혀갔어요! 병사가 끌고 가서는 처벌 받을 거라고 했어요. 감옥에 갇혀서 평생 못 나오면 어떡하죠? 혹시라도 광장에 매달리면-”
실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에메랄드 숲에서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칠 때처럼 윌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내가 발더스 게이트를 지키는 한 절대로.”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엄격함이 실피를 진정시켰다. 윌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일이야?”
“윌, 메티스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믿어주세요. 벡스랑 다니스가 맛있는 아몬드 빵을 구워주겠다고 해서 다같이 가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도착하니까 집이 불타고 있었어요!”
마치 그 현장을 보고 있는 것처럼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호흡이 가빠지고 내뱉는 문장이 짧아졌다.
“벡스랑 다니스가 안 보였어요. 설마 집에 있었던 걸까요?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갈 수 없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했어요. 그 둘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온 하늘이 빨갰어요. 거센 불길이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친구가 불타고, 비명이 들렸어요. 발더스 게이트는 아르베누스에 떨어진 거예요, 엘터렐처럼!”
실피가 숨을 헐떡였다. 윌은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그를 안아 들고 서재로 달려갔다. 다행히 플로릭이 마법으로 응급처치했다. 윌은 실피의 호흡이 돌아온 걸 보고 나서 창문으로 향했다. 연기는 아랫도시 잡화점 근처 상점가 거리에서 났다. 윌은 책장에서 깃털 낙하 마법 두루마리를 꺼내 단숨에 성 아래로 뛰어내렸다.
현장은 구경꾼, 용병대 할 것 없이 소란스러웠다. 그 가운데 벡스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다니스도 침울한 얼굴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사람들은 쉽게 입을 놀렸다.
“이제는 하다 하다 본인들 집까지 태워 먹는구먼.”
“윗도시에 집을 구하든가 해야지. 내 집도 어떻게 될까 불안해서 못 살겠어.”
윌은 그들을 물리고 벡스와 다니스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남은 아이들도 챙기러 다시 돌아오니 다행히 칼과 리아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곁에는 롤란이 용병대원에게 조사받고 있었다.
“몇 번을 말합니까! 메티스는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다고요!”
롤란이 언성을 높이자, 리아가 그의 팔을 잡아 저지했다.
“상냥하게 말씀드려.”
그렇게 말하는 리아도 굴욕감을 숨기지 못했다. 롤란은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벡스와 다니스가 아이들을 초대해서 우리가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재난 후의 도시는 아이들만 다니기엔 위험하니까요. 가는 길에 그들의 집이 있는 방향에서 연기가 나는 걸 발견했습니다.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제가 먼저 날아가 불을 껐습니다. 칼과 리아가 뒤이어 아이들을 데리고 왔고요.”
건물이 새까맣게 탔는데도 큰 화재로 번지지 않은 건 적절한 시기에 롤란이 마법으로 물을 퍼부은 덕분이었지만 그것이 결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장담하건대 메티스는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쪽 말대로 애한테 죄가 없다면 금방 풀려나겠죠.”
당사자는 간절히 호소하는데도 용병대워은 시건방진 말투로 조롱했다. 롤란이 참지 못하고 마법을 부리려고 하자 윌이 그 사이를 끼어들어 막았다. 당장이라도 화염구를 던질 것처럼 롤란의 손 주위로 불꽃이 일렁였다. 다급하게 칼이 뒤에서 롤란을 껴안으며 저지했다.
“롤란, 안돼! 상황이 좋지 않아.”
칼이 롤란의 팔을 내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이미 많은 눈이 그들을 지켜봤다.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졌고 갈 곳 잃은 롤란의 원망은 윌에게로 향했다.
발더스 게이트의 공식적인 최고 통치 기구는 의회로, 4인의 귀족이 발더스 게이트 각 영역을 담당했다. 하지만 현재는 윌, 얼더, 플로릭만 속해 1명이 부족한 채로 ‘삼인회’로 운영했다. 그 틈을 윗도시 귀족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파고들었다.
다만 그들은 일리시드 침공 당시 도시를 지키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도시를 구한 영웅과 그의 동료였던 윌이 대공으로 취임하자 원로원의 영향력은 더욱 떨어졌다. 과거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악마의 흔적을 문제 삼으며 윌의 임명에 관해 트집 잡았으나 이미 변경의 검으로서 명성을 알리고 레이븐가드로서 정통성을 획득한 그에게 워락의 계약은 도시를 지키려 했던 미담일 뿐, 흠이 되지는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원로원은 대상을 바꾸었다. 존재만으로도 멸시와 의심을 받았던 자로. 빌미만 던져주면 도시는 알아서 그들을 미워하리라.
도시를 재건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는 ‘노동력 부족’이었고 삼인회는 도시 바깥 인원을 수용해 해결하려 했다. 자연스레 티플링도 많이 유입됐는데 우연찮게도 원인불명의 화재 사건이 비슷하기에 다수 발생했다. 침공으로 이미 집을 잃은 시민은 또 한 번의 재난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고 심리적으로 몰린 그들은 무작정 탓할 대상이 필요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화염에 강한 특성을 내세워 도시를 전부 불태우는 자들이 있다고.
열기를 참을 수 있을 뿐 아무리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더라도 티플링은 불길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저항성도 상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약을 통해 모두가 얻을 수 있는 거였지만, 사실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기세를 등에 업고 원로원은 ‘강제 추방’을 내세워 발더스 게이트 성벽처럼 그들의 지지 세력을 굳건히 다졌다. 그 힘을 기반으로 티플링을 들여보낸 삼인회를 비난했다.
노골적으로 선동하는지라 삼인회는 이 모든 사단이 원로원의 계책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플로릭과 얼더는 증거도 없이 섣불리 추궁한다면 그간의 신임마저도 잃을 거라며 소문을 정정하려는 윌을 저지했다. 결국 책임지지 않은 진실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롤란이 삿대질하며 윌을 질책했다.
“네가 해결해. 그 높으신 권위로 명령하든 몰래 빼내 오든 메티스를 무사히 데리고 오라고.”, 꽉 깨문 잇새로 울분이 흘러나왔다. “난 못 하니까.”
라마지스 탑의 마스터가 무용해지는 순간은 얼마 없으리라. 롤란은 칼과 함께 리아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처지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윌은 죄책감을 떠안고 바실리스크 게이트 막사로 향했다.
감옥과 붙어있는 막사는 창이 없었다. 공기도 꿉꿉하며 안에 있으면 날씨는 물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것이다. 기둥의 횃불만이 공간을 밝히고 있어 사방이 어둑했고 어떤 상대라도 윤곽만 보여서 두려움을 일으킬 법했다.
갑옷을 입고 등 뒤에 거대한 도끼를 든 병사가 고압적인 자세로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그만 죄를 인정해!”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메티스는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그 태도에 병사는 아이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망할 티플링 새끼. 입만 열면 거짓말이나 지껄이기나 하고. 아홉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하! 지옥은 내가 또 잘 알지. 거기 가면 너 같은 겁쟁이가 오줌을 질질 흘리고 있더라고. 꽤 볼만 해!”
메티스는 질세라 병사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잔뜩 경계한 채 병사를 노려보는데 그의 뒤에서 막사로 들어오던 윌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한 말, 윌 앞에서도 똑같이 지껄여 보시지!”
메티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상관의 이름을 입에 담자, 병사가 얼굴을 붉히며 달려들었다.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윌이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그를 발견한 병사는 사색이 된 채 부리나케 막사를 벗어났다. 그 뒤통수에 대고 메티스가 꼴좋다는 듯이 비웃음을 날렸다.
“제가 대공이면 좋겠어요. 저런 놈들 싹 다 잘라버리게.”
“쉽진 않을 거야. 직위를 함부로 남용할 수 없게 주변에서 지켜볼 테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적어도 지금의 저보다는 나을 거 아니에요? 양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가지도 않을 테고.”
은근히 뼈가 실린 말에 윌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런 더러운 곳에 갇힐 일도 없겠죠?”
“꽤 아픈데.”
짓궂은 장난에 보답하기 위해 윌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인상을 찡그리자, 메티스가 만족스러워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윌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메티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위치에서는 윌에게 가려 문이 보이지 않았다.
끼이익, 문 닫히는 소리가 불쾌했다. 윌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메티스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금 적막이 찾아오고 둘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가기 전에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메티스가 짜증을 냈다.
“몇 번을 말하는 건지! 전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왜 벡스와 다니스 집에 불을 지르겠어요?”
“목격자가 있었어.", 윌은 말하기 괴로운 듯 힘겹게 다음을 이어갔다. “네가 불을 지른 걸 봤다고 해.”
“잘못 봤겠죠! 윌, 아니, 대공님. 저라고 도시의 소문을 못 들었을 것 같아요? 그거 때문에 요새는 불과 관련된 물품은 팔지도 않는다고요. 가뜩이나 장사가 안돼서 미치겠는데 제가 왜 거기에 기름을 붓겠어요!”
열심히 변호해도 윌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강경한 태도에 메티스가 울먹였다.
“윌은 나를 믿어줘야죠...”
상처받은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윌은 시선을 돌렸다. 검은 바탕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은 바닥을 향했지만, 오른쪽 의안은 굴러가지 못하고 메티스를 바라보았다.
“네게 앙심을 품은 자는 없었고?”
에메랄드 숲에서부터 저주받은 땅까지 척박한 환경에서도 물건을 주워 판 노련한 장사꾼인 메티스에게 발더스 게이트는 기회의 땅이자 손쉬운 시장이었다. 달오름탑의 귀중품도 인기가 좋았고 라마지스 탑 근처에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는 단골까지 생겼다. 하지만 그의 성공을 모두가 달가워한 건 아니었다.
“상인 몇 놈이 자주 시비를 걸었어요. 본인들 상품이 거지 같아서 손님이 없는 거면서 나를 탓하고-”, 말을 하던 도중 메티스는 무언가 깨달은 듯이 흥분하며 목청을 높였다. “그 자식들이 저를 방화범으로 몬 거예요! 제가 만만하니까!”
윌은 그 추측이 맞았으면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면 주변 상인 중에 티플링이 몇이나 되니?”
“저 혼자예요. 애들은 좀 있는데…그건 왜 물어봐요?”
원하던 것과 다른 답에 윌은 탄식했다. 만약 메티스의 말대로 상인 중의 하나가 거짓으로 증언했다면 그를 심문하여 진범을 밝혀내면 됐다. 운이 좋다면 원로원 귀족의 이름도 들춰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대답으로 메티스 발언의 진위가 모호해졌다. 목격자는 티플링이었으며 메티스의 인상착의까지도 정확하게 묘사했다. 화재 사건이 점점 그들을 옥죄었다.
라마지스 탑으로 돌아온 뒤 메티스는 침상 위에 엎으려 일어나질 못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금방 나오기는 했지만, 의지했던 윌에게 의심받고 동족에게 배신당한 충격 때문에 상심한 듯했다. 급기야 “티플링이면 조금이라도 깎아줬는데...”라며 지난 선의를 후회하기도 했다. 메티스가 어떤 위로도 마다하자 실피만 곁에 남아 그를 보살폈고 롤란은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라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닫았다.
유물과 귀한 서적이 사라진 후, 공실이 된 방은 아이들의 침실이 됐다. 그것도 모자라 서재로 쓰는 탑 상층부 중앙도 숙식 장소로 썼는데 거기서 다니스가 벡스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벼운 일상복만 입었던 터라 태가 어색했다. 롤란은 기둥에 삐딱하게 서서 툴툴거렸다.
“완전 안 어울려.”
“처음이잖아. 곧 익숙해지겠지.”
험난한 상황에서도 웃는 그들을 보며 롤란은 칼과 리아를 떠올렸다. 어느새 그들도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됐으니, 벡스가 “긍정적인 마음가짐, 몰라?”라며 격려해도 롤란은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여태껏 칼 한 번 안 들어봤으면서 왜 용병대에 들어가겠다는 건데?”
“지금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곳도 흔치 않잖아. 일급도 많이 준다고 하고. 빨리 돈 모아서 벡스랑 살 집을 다시 구해야지.”
“급할 필요가 있어? 더 머물러도 돼. 탑이 워낙 넓어서.”
“고마워, 롤란. 우리를 위하는 마음 알아.”, 서둘러 전한 인사에는 진심을 담겨 있었다. 그렇다 해도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고 싶어.”
“...마음대로 해.”
심통이 난 롤란은 다니스에게 힘을 실어 가방을 던졌다. 안을 열어보니 회복 물약과 고급 마법 주문이 적힌 두루마리가 가득했다. 덕분에 벡스는 안심하고 다니스를 배웅할 수 있었지만, 눈물이 고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롤란이 은근슬쩍 다가와 그를 달랬다.
“그래도 라크리사가 용병대에 티플링이 많아져서 텃세가 줄었다고-”
줄이 퉁명스럽게 튕기는 소리에 말이 끊겼다.
위로하는 데 재주가 없던 롤란은 실언하곤 했다. 예를 들면 신혼집을 뛰쳐나온 사람 앞에서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 롤란과 벡스가 동시에 뒤를 돌아 알피라의 기분을 살폈다.
“라크리사를 만났다고? 언제?”
롤란이 고개를 돌려도 알피라가 끈질기게 물었다.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롤란이 답했다.
“잡화점에 왔을 때 한 번.”
“근데 나를 안 찾아왔어?”, 알피라가 울상을 지었다. “너무해. 나 여기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나서 라크리사는 주점에서 잘렸다. 앉 좋은 여론에 질 나쁜 손님이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손찌검하기를 다반사였다. 그래도 라크리사는 참았으나 가게 주인이 싸움은 싫다며 그를 치워버렸다. 손님을 내쫓을 수 없다는 구차한 이유였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고 월세를 낼 돈도 없었다. 겨우 마련한 보금자리를 잃을 것 같아 라크리사는 날카로워졌다.
특히 생계와 관련해 알피라와 자주 싸웠다. 알피라가 돕겠다고 하면 라크리사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막무가내로 안 된다는 연인의 태도에 알피라는 감정이 상했고 라크리사도 뜻대로 안 따라주는 연인이 답답했다. 응어리는 이내 터져 라크리사 심한 말을 퍼부었고 상처 입은 알피라는 집을 뛰쳐나왔다.
자의든 타의든 갈 곳 없는 티플링은 자연스레 라마지스 탑으로 향했다. 그건 보육원에서 거절당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구하는 데 방해될까 봐 롤란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연민 좀 베풀어.”라는 리아의 잔소리에 방을 내주었다.
발더스 게이트로 오기까지 동족을 지켜주긴 했다마는 롤란에게 가족은 리아와 칼뿐이었다. 오로지 그들만 무사하면 됐다. 더군다나 탑의 마스터인 롤란은 엘터렐 출신이 아니었고 그걸 변명 삼아 그는 티플링이 겪는 어려움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늦은 밤, 실피가 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롤란은 “메티스랑 어디서 놀고 있겠지.”라며 안일하게 생각했지마는 칼은 달랐다. 항상 힙사이드 바닷가 근처에서 신문을 팔던 실피는 다 못 판 날에도 제시간에는 돌아오던 아이였다. 칼은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라며 그를 데리러 탑을 나섰다. 처음에 롤란은 걱정하지 않았다. 칼은 검을 다룰 줄 알았고 스스로 지킬 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롤란이 따로 챙겨준 무기까지 있었으니 금방 실피와 함께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둘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롤란은 밖에서 기다렸다. 멀리서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실피가 칼에게 안겨 있는 건지 발걸음 소리가 하나였다. 상점이 다 문을 닫은 시간이라 주변이 어두웠고 잡화점도 불 꺼진 상태였다. 광원이라곤 롤란이 든 등불뿐이었다. 어스름한 주황빛에 서서히 모습이 드러났다.
칼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고 도리어 “네가 나와서 다행이다. 리아가 보기 전에 상처부터 치료해 줘.”라며 숨기려 들었다. 걱정을 넘어서 화가 난 롤란은 사건의 경위를 캐물었지만, 칼은 실피가 깬다며 그의 입을 막았다.
훗날 전해 듣기로 티플링은 으레 겪는 일이라고 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늦게까지 신문을 팔던 아이가 주정뱅이에게 험한 짓을 당하는 거에 비하면 성인이 맞은 게 다행이라 여길 정도로 흔했다.
라마지스 탑은 아랫도시 중앙에 있는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그 마스터인 롤란과 그의 가족도 발더스 게이트 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 터. 그런데도 칼은 다쳤다. 아무리 개인이 강하다 한들 다수의 폭력을 굴복시키기엔 한계가 있었다. 방관의 대가를 치르며 롤란은 가족의 범위를 바꿔야 했다.
시민을 대하는 데 있어 삼인회는 보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티플링에게 우호적인 권위 기관인 것과 별개로 악소문을 바로 잡아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롤란은 직접 화재 사건의 진범을 잡아 해명하리라 결심했는데 그 무렵 윌이 먼저 협조를 부탁했다.
화재 현장에는 윌이 먼저 와 있었다. 언쟁 이후 처음 만난 거라 그는 롤란과 있는 게 어색한 듯했다. 그것이 부채감에서 비롯된 걸 알았지만 롤란은 일부러 그 불편감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윌도 감내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집 외부에서 폭탄 잔해나 기름 자국과 같은 인위적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어. 안에서 불이 일어난 것 같은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금 벡스와 다니스가 스스로 그들의 집을 태웠다고 말하는 거야?”
잦은 의심에 예민해진 롤란이 언성을 높이자, 주변 조사관들의 이목이 쏠렸다. 윌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롤란 사이로 걸어가며 다수의 시선을 차단했다.
“우리는 다양한 원인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 마법까지도. 그래서 마법에 저명한 라마지스 탑의 마스터를 모신 거야. 확인해 주겠어?”
윌의 어깨 너머로 불신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롤란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 무례한 태도를 단숨에 순정적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떠한 엄벌도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끌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롤란은 “알량한 배려는 집어치우고 명령하지 그래. 도시의 권위자이신데.”라며 정중히 보인 윌의 신뢰를 빈정대는 것으로 자위했다.
롤란이 꼬리를 살랑이며 위브를 휘저었다.
“네 예상대로 마법의 흔적이 있네. 지연 폭발하는 화염구가 시간차를 두고 건물 안에서 터진 것 같아. 그래서 밖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안 남은 거야. 문제는 그 마법이 고위 마법이라는 건데 그 위험성 때문에 우리 잡화점에서도 두루마리로 팔지 않아.”
“발더스 게이트 내에서 그 마법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는 거군. 너와 같은 탑의 마스터나-”, 롤란이 반박하려고 들자, 윌이 그를 달래며 다가왔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둘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고문 마법사를 둔 귀족정도.”
윌은 한 발짝 떨어져 모두가 들으라는 식으로 쩌렁쩌렁 외쳤다.
“그런 강력한 마법이 쓰였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야, 롤란. 대공의 권한으로 지금부터 라마지스 탑을 수색하도록 하지.”
멋대로 통보하고는 윌이 현장을 떠나자, 몇몇 조사관이 롤란을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단박에 의도를 파악한 롤란이 장단에 맞춰 비굴하게 빌면서 윌을 쫓아갔다.
멀지 않은 곳, 탑과 반대로 난 길에서 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롤란이 불만 가득한 어투로 투덜거렸다.
“리아라 포티어 영관처럼 용병대에는 귀족 가문 출신의 조사관이 있어. 대놓고 그들의 집을 들쑤신다고 말하면 그대로 가문에 일러바칠 테고 그러면 탐문하기 힘들어지겠지. 그리고...네게 관심의 화살을 돌리면 귀족들이 쉽게 방심할 거야.”
“네가 그들의 편인 줄 알고? 고지식하던 변경의 검이 제법 정치인다워졌어.”
윌이 사과하려고 하자 롤란이 거들먹거렸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약간의 희생쯤이야 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지. 내 가족들도 이런 취급이 하루이틀이 아닐 텐데 내 차례가 되긴 했어.”
뼈 있는 농담에 윌이 어색하게 웃었다.
“알량한 자부심인지 가문은 각자마다 고유의 마법을 쓰려고 해.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은데 뭐, 그 덕분에 가문을 특정할 수 있을 테니까. 위브를 더 파고들면 출처가 더 확실해질 거야. 라마지스 탑 수색하는 척 정보를 받으러 와. 생각 탐지 두루마리 몇 개 준비해 줄 테니 받아 가고.”
자신만만한 태도는 위저드 특유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뛰어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롤란은 재빠르게 어떤 가문의 마법인지 특정했다. 하지만 그 시전자가 모호했다. 이는 마법 두루마리를 이용했다는 뜻으로 이대로는 진범을 잡아도 그가 가문 소속이 아니라면 귀족과 연관 지을 수 없었다.
난관에 봉착했으나 실마리는 뜻밖의 곳에서 찾았다.
곳간에 배정된 다니스는 먼저 들어온 라크리사와 함께 근무 서는 때가 많았다. 모여 있으면 경계를 풀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티플링도 많았는데 그 덕분에 안면과 이름을 튼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어쩐지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다니스는 혼자만의 착각인 줄 알았으나 라크리사도 똑같이 느꼈다고 했다. 그들은 이 조짐을 넘기지 않았고 롤란을 통해 윌에게 전달했다.
윌은 가장 먼저 도시 바깥 인원 목록을 살폈다. 배급을 관리하기 위해 작성해 둔 것으로 다니스가 언급한 이름을 확인했으나 없었다. 다음은 도시 안팎으로 드나든 목록을 봤다. 그곳에 사라진 티플링의 이름이 있었다. 신빙성을 위해 라크리사나 다른 병사에게 교차 검증하니 그들도 같은 이름을 골랐다. 윌은 묘한 기시감에 이름을 다시 보았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적어 두니 더 명확했다. 곳간 폭행 사건의 피해자 목록과 많이 겹쳤다. 더욱 놀라웠던 건 화재 현장에서 메티스를 봤다고 말했던 용의자도 있었다.
도시는 일정한 ‘자격’을 요구했다. 다몬처럼 장인 기술이 있으면 생산 활동이 가능하다고 인정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생계 수단을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정착금’으로 증명해야 했다. 그 금액이 적지 않아서 못 들어가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도시로 들어온다면 그건 수상한 일이었다. 윌은 잦아진 폭행 사건과 화재 사건이 연관 있다고 판단하여 곳간을 수색하고자 했다.
짙은 밤도 금환처럼 빛나는 눈동자에는 무력했다. 암시야를 가진 다니스와 라크리사는 곳간 근처 수풀 사이에 숨어 수상한 자가 없는지 감시했다. 본래 기약 없는 기다림이 지루한 법, 다니스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크게 하품을 하자 라크리사가 다그쳤다.
“그러다 들키겠어.”
“이 정도는 괜찮아. 쟤 코 고는 소리에 다 묻혔을 거야.”
다니스가 가리킨 곳에는 쏘루가 누워 자고 있었다. 그는 엘터렐에서 도망친 티플링 중 도시 밖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양보하다 보니 마지막이 되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용병대에 자원해 천막생활이라도 청산하라고 회유해도 쏘루는 용병대만큼은 되기 싫다고 했다. 재난 당시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용병대가 된 이들은 도시 밖으로 할당돼서도 그를 만나지 않았고 멀리서 지켜봤다.
라크리사는 그와 같이 곳간에서 버텼던 시절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저 코골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자주 깼는데. 다시 잠드는 것도 힘들어서 어찌나 쏘루가 미웠는지. 그래도 쟤 코를 틀어막을 순 없잖아. 그래서 잠이 올 때까지 모닥불을 바라봤어. 타는 불을 보노라면 아르베누스가 떠올랐지만, 오히려 그게 지금의 나는 그곳에 없다는 걸 알게 되니까 안심되더라. 그런데도 난...다니스, 우리는 달오름 탑에서도 버텼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 험난했던 여정보다 발더스 게이트가 더 숨 막히는 걸까? 왜 우리는 아직도 고단한 걸까?”
라크리사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괴로워했다.
“그래, 쏘루는 핑계였고 그 당시 난 불안한 생각 때문에 잠들지 못했어. 곳간에서 머물고 있어도 지원이 끊기면 우리는 다시 떠돌아야 했으니까. 이번엔 목적지도 없이! 그래서 나는 무서웠어. 도시가 우리를 버릴까 봐, 그래서 우리가 죽을까 봐. 알피라가 없었다면 난 공포에 떨며 매일 밤을 난 뜬눈으로 지새웠을 거야.”
일그러졌던 라크리사의 미간이 펴졌다. 그가 뒤척일 때마다 알피라는 라크리사를 품 안에 안아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엘터렐에서도 들었던 익숙한 노래는 일정한 심장박동과 어우러져 라크리사를 안심시켰다.
“난 그 노래가 계속됐으면 했어. 그래서 알피라가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은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라크리사는 다니스에게 알피라와의 갈등을 설명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쫓겨나자 라크리사는 새로운 집을 구하기 위해 용병대에 자원했다. 하지만 거기서 받는 돈도 두 사람이 살 집을 사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급한 대로 라크리사는 알피라에게 숙식할 작업실을 구해주고 본인은 용병대 숙소에 머물려고 했는데 알피라가 떨어지기 싫다며 차라리 그가 모아둔 돈이 있으니 그걸 보태서 같이 살 집을 구하자고 했다. 라크리사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돈은 음악 학교를 짓기 위해 알피라가 엘터렐에서부터 모아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라크리사는 알피라의 음악에 맹목적으로 굴었다. 그러니 그의 꿈을 희생하여 현실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유일한 안식처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집어삼켰고 기어코 라크리사는 “노래 부르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거나 잘해!”라며 알피라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
다니스는 “와, 나라면 절대로 벡스에게 하지 않았을 말이네.”라며 무거웠던 분위기를 띄웠다. 동시에 “알피라도 네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 거야.”라며 그의 친구를 위로하자, 라크리사는 힘없이 웃었다. 그도 알았다. 제 연인은 아무리 화가 났어도 결국을 용서해 줄 거라는 걸.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또 궁지에 몰려도 똑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멀리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형체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화재 사건의 범인이길 바라며 라크리사와 다니스는 숨을 죽이고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그들이 뭔가를 주고받은 순간, 라크리사와 다니스가 그들을 덮쳤다. 하나는 붙잡았으나 또 다른 하나는 마법사인지 알 수 없는 마법을 이용해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다니스가 끝까지 쫓아갔으나 놓치고 말았다.
남은 건 라크리사가 잡은 용의자뿐이었다. 그도 도망치지 못하게 두 팔을 뒤로 꺾어 노끈으로 묶었다. 그러자 그가 쥐고 있던 자루가 툭 떨어지면서 그 안에서 금화가 쏟아져 나왔다. 라크리사는 그의 팔을 더 꺾으며 사실대로 말하라고 협박했다. 용의자가 알겠노라 항복했는데도 그는 그간의 억눌린 분노가 터진 것처럼 강압적으로 굴었다. 용의자가 아파서 울음을 터트렸다. 다니스가 그의 친구를 말리며 둘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라크리사는 용의자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삼인회는 서재에 모여 누군가를 기다렸다. 곧이어 문을 박차고 롤란이 들어왔다. 윌이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그들은 윌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편에는 얼더와 플로릭이, 왼편에 롤란이 앉았다.
용병대를 이끄는 얼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초빙에 응해줘서 감사하네, 라마지스 탑의 마스터. 피차 바쁜 몸이니 인사는 여기까지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화재 사건의 용의자를 네가 데리고 있다고 들었어. 그를 우리 쪽에 넘겨주기를 바라네.”
“이유는?”
거절을 내포하는 롤란의 반문에 얼더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은 우리 용병대 관할이야.”
“도시라는 건 성벽 안과 밖을 다 포함하는 거고?”
“자꾸 말 돌리지 말게!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너희들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걸 왜 모르나? 라마지스 탑의 마스터께선 우리와 달리 화재사건을 해결하고 싶지 않나 보군.”, 얼더가 언성을 살짝 높이자, 윌이 말리며 “그래, 안팎 구분 없어.”라며 롤란에게 대신 답했다.
“그렇다면 밖에 있는 사람도 시민일 텐데 왜 용병대의 보호를 받지 못한 거지? 라크리사와 다니스가 용의자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만신창이였어. 물어보니 곳간에 있는 놈들에게 얻어맞았다고 하더군. 그는 발더스 게이트 근처 마을에서 살던 주민이었어. 남들과 다를 거 없이 침공 때문에 발더스 게이트로 대피 온 사람이라고. 평화가 찾아온 뒤에도 집이 폐허가 돼서 돌아갈 곳도 없는 사람!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망치기 바쁜 와중에 재산을 챙길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 그는 곳간에서 혼자 머물렀지만 안심했어. 용병대가 지켜줄 거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됐냐고?”
롤란이 마치 용의자의 상처를 보여주듯이 본인의 뿔을 만지며 용의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용병대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보호받아야 할 시민이 다쳤어. 그런 너희들을 내가 어떻게 믿고 용의자를 보내!”
“같은 티플링이라고 감싸는 건가?”
플로릭이 눈치껏 용의자의 신분을 추측하자 롤란은 혀를 찼다.
“그랬다면 괜히 이렇게 힘 빼지 않고 탑에서 영영 안 나왔겠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윌이 중재했다. 말소리가 잦아들고 날 선 정적이 자리를 채웠다. 상충하는 이해관계에 의견을 굽히고 싶은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아쉬운 상대가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했다.
“나도 말싸움할 생각은 없어.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너희들에게 용의자를 친히 인도해 드린다고 약속할게.”
롤란이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협상을 제의했다. 얼더는 못마땅했으나 윌이 먼저 제안을 들어보겠노라 찬성하자 입을 닫았다.
“공개 재판을 열어. 원로원, 삼인회 가릴 것 없이 참석시키고. 그리고 날 너희들의 마법 자문으로 기용해. 귀족만 참가 가능하다는 헛소리를 집어치우고. 탑의 마스터 정도면 자격은 충분할 거야.”
플로릭이 반박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롤란이 선수 쳤다.
“나는! 사건 현장에 남아있던 위브를 조사해서 어떤 가문인지는 알아냈어. 당신들에게 알려줄 의향도 있고. 하지만 시전자마다 보이는 개별적인 특징이 없어. 만약 인물을 특정하지 않고 가문만 추궁한다면 내부에서 책임을 돌리느라 시간만 끌 거야.”
롤란은 책상 위에 두루마리와 묵직한 자루를 올려두었다.
“며칠 전 용의자에게 누군가 찾아와서 부탁 하나 들어주면 정착금으로 내고도 남을 돈을 주겠다고 했어. 수상하긴 했어도 한시라도 빨리 곳간을 벗어나고 싶었던 용의자가 물불 가릴 처지였겠어? 그가 말하기를 그날 밤에 돈과 함께 이 마법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지정된 곳에 운반하면 된다고 했어. 그 장소의 주소가 도시 안 주택지였고.”
두루마리에 담긴 마법은 롤란이 전에 말했던 지연 폭발 화염구였다.
“그는 가문 관계자의 얼굴을 봤어. 그게 끄나풀일지, 고위 마법사일지는 몰라도 가문을 조사할 명분은 물론 정보까지도 얻을 수 있다고.”
“그가 원로원을 언급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상상하자 플로릭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얼더는 여전히 의심했다.
“용의자가 협조한다고 어떻게 믿지? 재판에서 위증할 수도 있잖나.”
“뭘 위해서? 처벌을 피하고자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들 얻는 거라곤 언제 꼬리 자를지도 모르는 귀족의 감시뿐인데. 그가 원하는 건 안전이야. 재판에 솔직하게 응하면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고. 합리적으로 생각해.”
달갑지는 않았으나 롤란의 제안은 삼인회가 그토록 원했던 바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쉽사리 거절할 수 없었고 며칠 뒤에 결정하는 것으로 유보한 뒤 회의가 끝났다.
서재를 나서는 롤란을 따라 윌이 걸음을 함께했다. 난간에서 낙하 마법으로 단숨에 내려가려던 롤란은 동행에 어울리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긍정적인 답이 나올 거야.”
설사 아니더라도 윌은 그리하도록 애쓰겠노라 약속하는 듯이 말했다. 그 의지를 지키라는 듯이 롤란이 오랫동안 윌을 응시했다.
“그래야 할 거야. 귀족 놈들의 꾐에 넘어간 건 녀석은 하나가 아니거든. 고통을 피해 도시 안으로 들어올 수만 있다면 거짓 증언도 할 테고.”
윌은 단번에 메티스를 용의자라고 한 목격자를 떠올렸다.
“그를 만난 거야?”
“아니, 생각 탐지 마법을 써서 몰래 속마음을 읽었어.”
마법을 쓴 개인만 알 수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법적 효력은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자백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공개 재판을 열자고 한 거야. 누구라도 그걸 본다면 뉘우칠 거고 덩달아 원로원도 고발하겠지. 물론 죗값은 치러야 하겠지만.”
롤란은 씁쓸한 현실을 기어코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용병대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탑에 보호하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도시 안팎에 사는 티플링 전부를. 하지만 그는 제2의 엘터렐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었다. 티플링은 발더스 게이트에 속해야 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그 전에 너는 우리들을 지킬 수 있겠어? 이건 친구로서 묻는 게 아니야. 발더스 게이트 시민으로서 대공께 부탁하는 거지.”
“...노력하지.”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라는 걸 둘 다 알았다. 그래서 롤란은 정문을 나서기 전 결심한 듯 윌에게 요구했다.
“윌, 널 탓하려는 말은 아니었어. 다만 당사자가 아니라면 공감 못 할 부분도 있다는 거야. 그들의 잘못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그럴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사정을 난 알아. 그리고 삼인회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레이븐가드 대공, 의회는 4인으로 구성된다고 들었어. 이 사건이 잘 끝나면...그 빈자리에 날 임명해.”
당황한 윌이 미간을 찌푸렸다. “롤란, 아무리 네 부탁이라도 그건 힘들어.”라는 예상했던 거절이 날아왔다. 하지만 롤란은 허락을 구하고자 단호히 말한 것이 아니었다. 티플링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마땅히 도시에서 삶을 보장할 수 있기 위해서라면 원로원을 뒤흔들고 삼인회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리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