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지지 못한 빈 욕구가 이렇게나 무거울 수 있나?
채워지지 못한 빈 욕구가 이렇게나 무거울 수 있나?
어느 때부터였던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다. 제블로어는 ‘그 질문’을 항상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매번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해주는 이 없어도 끝없이.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의식은 통제할 수 없다. 그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질문은 머릿속의 공간을 점점 넓게 차지해 갔다.
나는 악마인가. 라는 질문.
누군가 빚었을지 모르는 자기 모습은 그 질문 속 주체와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가 진정한 그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건 티플링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추락. 그 갑작스러운 일. 가진 모든 것이 사라졌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그 일. 그 후 제블로어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악마의 고향. 붉은 피부와 굵은 뿔. 뾰족한 꼬리. 단어들이 영원히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나 자꾸만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의문들은 찰나의 것으로 치부하고 묻어두어야 할 것이었다. 그 질문, 그 의구심은 난민이 된 티플링 모두에게 들었던 생각이었을 테니까. 제블로어는 그렇기에 자신만큼은 정말로 악마가 되어버리지는 말자는 더욱 강한 자기 안의 선을 그어놓았는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그렇게 노력하기로 했다.
그는 리더였으니까.
“당신은 악마예요, 제블로어.”
그러나 에메랄드 숲의 낯익은 얼굴들을 발더스 게이트에서 재회했을 때는 확실히 그렇게 불렸다. 똑같은 뿔과 비슷한 피부색을 가진 동족에게서. 씨근대며 눈물을 겨우 삼키는 소녀의 모습에 제블로어는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엘투렐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있었던 시절 제블로어에게 꽃잎을 뿌리며 승전을 응원했던 소녀의 앳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만큼 오래 알던 사이들. 그러나 그의 행동을 감싸주는 이는 없었다. 그간의 노력이랄 것이 무색하게 만든 것은 제블로어 자신이었으니까. 어느 쪽으로도 제블로어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새하얘진 정신으로 무슨 말을 들으며 걸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 제블로어는 악마여야 마땅했다. 그에게로 쏟아지는 비난과 경멸의 눈동자들을 가슴에 새겨야 했다. 그는 멍청한 선택을 한 뒤 용서받지 못했다. 떳떳할 수 없었다. 그는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아니, 최선이라고 저 자신을 속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알았기에 더 부끄러워졌다. 제블로어는 그날 이후 발더스 게이트에서 방황했다. 눈에 띄지 않을 험한 길만 찾아다니며 그는 사람들을 피했다.
그러기를 며칠이었을까. 죄책감 속에서 소식을 들었다. 절대자의 군대가 발더스 게이트로 내려온다고.
기회.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지만 이 소식이 제블로어에게는 속죄의 기회처럼 느껴졌다. 이번에야말로 맞서 싸워 이겨야만 한다는 헬라이더로서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인정.
그러나 제블로어는 그 욕구에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로부터?’
인정욕구라니. 누구에게 그렇게나 인정받고 싶단 말인가.
애시당초 그가 어딘가에 속하기는 했나?
어딘가에 속해도 되는 것일까?
‘제대로 된 한 인간이 되고 싶다.’
채워지지 못한 빈 욕구가 이렇게나 무거울 수 있나?
기대로 뛰었던 심장이 한순간에 불안으로 바뀌어 쿵쾅댔다. 이런 한 줌 희망을 느끼는 순간마저 완전히 뒤바뀌어 희망이 아닌 죄책감으로 숨찬 가슴은 어찌할 수 없는 제블로어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래, 돌이켜 떠올려보면 사실 전부 기만이었다. 다시금 헬라이더의 모습으로 돌아가 고결한 맹세를 되찾고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것은. 이루지 못할 꿈에 젖어 에메랄드 숲의 사람들을 더 위험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오만 때문이었다.
그런 것이라고 제블로어는 자책했다. 때문에 발더스 게이트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협은 제블로어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어차피 다가올 일이었으나 예상보다 일렀다. 시간을 더 달라고 누군가에게 애걸할 수도 없었다. 이 싸움에 나서서 이기면 그는 원래 자신이 있던, 자신이 가고 싶은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용납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제블로어는 괴로움에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하필이었을까.
다음 날 그를 만난 것은 제블로어에게 다시 찾아온 유혹이었다. 비참한 기분으로 발더스 게이트에 왔을 때와 똑같은 날씨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하러 제블로어는 임시 숙소처럼 쓰던 동굴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악마’는 빛 하나 들지 않는 암흑 자체인 동굴 앞에 늘씬하게 서 있었다.
라파엘.
유명한 악마를 들어본 적은 많았으나 대면은 처음이었다. 따라서 놀랄 법도 했으나 피로와 고뇌로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제블로어는 덤덤히 그를 마주했다. 붉은빛의 안광이 언뜻거렸다. 그 눈을 마주하던 제블로어는 알 수 있었다. 단지 서 있을 뿐인 그가 가진 재주. 가만히 사냥감을 노려보는 최상위 포식자 같은 분위기. 그것이 주변을 꾸며주듯 동굴 입구는 마치 어두운 고급 대리석 기둥처럼 느껴졌다.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값진 것으로 보이게 했다. 아니면 제블로어가 그만큼 구원을 바라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악마는 입을 열었다.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련한 늙은 쥐로군.”
악마는 항상 유혹에 유리한 선공을 한다. 그는 이미 제블로어에 관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처량하고, 동정심을 자아내는 이 꼴이라니! 헬라이더의 위상이 이렇게나 떨어지다니!”
비꼼이 가득 담긴 말을 하며 연극적인 몸짓을 이어가는 모습에 제블로어는 답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심한 모욕을 당한대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무엇보다도 제블로어는 지쳐있었다. 온종일 기를 쓰고 눈에 띄려 하지 않는 것과 상반되는 행동하고 다녔기 때문에 특히나. 주름진 옆모습이 약간은 비틀거리며 동굴로 들어오는 걸 보던 악마가 혀를 찼다.
“딱 그대에게 어울리는 시궁창 속에 있네만 설마 썩어 문드러지는 것까지 바라진 않겠지?”
“그러는 당신은 내게 뭘 바라나?”
제블로어가 익히 들어 아는 바로 그들은 종종 본인에게보다 타인에게 더 소중한 것을 빼앗고 즐거워한다. 강탈이 아니라 거래라며 들먹이고 교묘한 유혹과 사기를 일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늙은 쥐의 볼품없는 가죽이라도 바치라는 건가?”
시비에 반응하자 악마는 조금 더 창의력을 발휘해 보라는 듯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조금만 더 머리를 굴려보게. 적어도 썩은 가죽보다는 좋은 걸 내게 줄 수 있으니.”
보통 때라면 제블로어는 이런 식의 신경을 갉아 먹는 화법에 오래 버티지 않고 주먹을 날려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주먹질로 통하지 않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차라리 아라딘같은 다혈질이 상대하기 편하다는 걸 제블로어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제블로어는 더는 꼬임에 속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악마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을 생각도 없었다. 말했듯이 그에게 남은 것은 가죽뿐일 것이다. 교환이나 거래를 할 만한 것도 없을 뿐더러 악마의 거래는 할 것이 못 된다. 끌끌거리며 웃는 그림자가 동굴 속에 스며들었다. 제블로어가 입을 다물기로 한 것을 눈치챈 비웃음이었다.
“과연 생긴대로 고지식한 쥐로군. 아무말도 하지 않을 셈인가?”
“그래. 알았으면 여기서 나가주시게.”
“글쎄, 직접 행차한 보람이라도 있게 해줬으면 하는데.”
악마는 제법 끈질겼다. 이쯤 되니 제블로어는 정말로 제게 가치 있는 무언가라도 있나 싶어졌다. 거래할 만한 것이 없으면 악마가 흥미를 느낄 리 만무했기에.
“정보를 원하는 건가?”
“이런, 재미없군.”
제블로어의 질문에 악마가 고개를 저었다.
“늙은 쥐여, 내가 원하는 것만을 알아내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그대의 욕망을 말해보는 건 어떨까. 가령…….”
뜸 들이던 악마의 손가락이 제블로어의 뿔을 가볍게 훑었다.
“가죽마저 남김없이 빈털터리가 된 주제에도 다시 쥐들의 대장이 되고 싶다든가.”
순간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불쾌감에 제블로어는 악마의 손을 쳐냈다.
“꺼져!”
이미 그의 욕구를 알고 있으면서 마음을 헤집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제블로어는 이게 악마의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장 비참한 인간을 골라 상처를 헤집는 것이 악마의 기쁨. 악마의 양분. 악마의 본질. 라파엘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제블로어는 라파엘을 쳐내고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모든 반응 자체가 악마의 비위를 맞춰주는 꼴이 되지 않았는가. 눈을 감고 돌아선 제블로어는 동굴 안쪽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너무 그렇게 매몰차게 굴지 말게. 손님이 싫다고 얘기도 듣지 않고 쫓아내는 건 무례하지 않나?”
제블로어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쯤 하면 악마도 거래 따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저 어두운 곳으로, 축축한 곳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라파엘에 대한 오판을 직감한 것은 다음 순간 제블로어의 목에 뜨거운 불길 같은 손이 감겨왔을 때였다. 단숨에 삼켜버릴 듯 그러쥔 손에 숨이 턱 막혀오는 가운데 제블로어는 잔잔하게 분노한 악마의 눈과 마주쳤다.
“손님이 아니라 무례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런데 넌 그 모험가들과는 달라, 쥐새끼. 난 거래하러 온 게 아니니까.”
제블로어는 그 말에 자신의 통찰도 빛바랬음을 느꼈다. 그래, 설마하니 거래였겠는가. 이런 식의 협박이면 몰라도. 제블로어는 그저 완벽히 덫에 걸렸을 뿐이다. 악마는 그가 컥컥대며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손을 풀어주었다. 아. 제블로어는 목을 감싸며 쓰러진 채 생각했다. 정말로 힘없는 늙은 쥐가 된 것만 같지 않은가.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사치이지 않은가. 악마는 제 소맷자락을 톡톡 털며 가소롭다는 듯 제블로어를 내려다보았다.
“자, 쥐새끼여. 손해 보는 교환은 아니도록 값은 쳐주지. 호의를 이제는 받아들이게. 그리고 내게 그대도 잘 아는 모험가의 정보를 털어놓는 게 좋아.”
모험가? 제블로어는 콜록대며 라파엘이 원하는 것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아, 에메랄드 숲에 고블린들을 죽이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들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라면……. 제블로어는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동굴 벽에 몸을 기댔다. 눅눅하고 우울한 습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온몸의 관절이 쑤시다 못해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제블로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만난 적 있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네. 위치를 원했던 거라면 헛다리를 짚었군.”
“그런 하찮은 것을 원했겠나?”
거의 깔깔대듯 비웃음을 흘린 악마가 제블로어의 뿔을 움켜쥐었다. 제블로어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염소의 기분이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묵직하게 당겨오는 손아귀가 소름 끼쳤다.
“타브의 진명(眞名)을 대.”
악마가 속삭였다. 제블로어는 그제야 악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차렸다. 라파엘은 타브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는 것이다.
아름다운 에메랄드 숲에서 고블린들을 무찌르고 할신이 돌아온 그날, 친구가 된 기념으로 알려주겠다며 타브는 제블로어의 귀에 취한 채 웅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당시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타브의 진짜 이름이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파엘이 말하라고 하는 지금 이 순간에 오기 전까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면서. 제블로어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차피 모든 걸 잃지 않았던가. 자신의 정체마저 눈앞의 악마와도 같은 취급을 받은 상황에서 더 이상 나락으로 갈 곳도 없으니까.
죽음으로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곳이야말로 정말로 제블로어에게 어울리는 자리일지도.
한숨처럼 제블로어는 털어놓았다.
“모르네.”
“흐음. 뻔한 거짓말의 시작이로군.”
“정말 몰라. 취한 채로 내게 무어라 말하긴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네.”
악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입 가벼운 영웅께서 다른 티플링들에게 쫑알댔는지 찾아가 봐야겠다며 체념한 채 돌아설 줄 알았나?”
“아니.”
어느새 제블로어의 손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이 들려있었다. 라파엘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어차피 내놓은 목숨 조금 일찍 거두라 할 참이었지. 난 죽어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 행동에 하핫,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순수하다 못해 맑게 느껴지는 조소였다. 악마는 한참을 웃다가 제블로어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검을 목에 댄 제블로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내려가는 붉은 눈이 느껴졌다. 그러나 무감한 시선. 제블로어는 자신이 보기에도 이런 꼴이 볼품없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악마가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그러나 라파엘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당장에 원하는 걸 얻지 못하더라도 제블로어의 시체를 통해 타브를 고문해 가며 어떤 것이든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 일은 딱히 악마에게 기상천외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닌 일상적인 유희에 불과하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블로어는 그 모든 것을 예상하면서도 목을 그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설령 그런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제블로어는 고지식한 쥐였으니까. 타고나기를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제블로어는 기꺼이 몇 번이고 친구에게 도움을 받은 처지에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게 두 번의 배신보다 나았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모든 결정은 제블로어가 태어나자마자 정해진 것처럼 망설임 없었다. 마음을 정한 제블로어가 지그시 눈을 감았을 때였다.
‘지진?’
알 수 없는 파동이 느껴지며 몸이 흔들렸다. 제블로어는 살짝 휘청이며 검을 삐끗할 뻔했다. 동시에 고개를 들자 라파엘의 시선은 저 먼 곳을 향해있었다. 어디를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보였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일었으나 라파엘의 눈빛은 제블로어의 감정과 정반대였다. 그는 잠깐의 희열을 제블로어에게 엿보도록 방심해 버렸다.
‘절대자!’
제블로어는 불길한 진동에 최근 들었던 소식을 떠올렸다. 군대가 온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의 멸망이 눈앞에 있었다. 곧 퍼질 절망 외에 악마가 반길 만한 것이 또 있을까? 그걸 깨달은 순간 제블로어는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라파엘의 기쁨에 반사적으로 움직여 그의 목을 꿰뚫도록 검을 들고 몸을 날려본다. 어쩌면 이것 또한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블로어의 의식이 끊겼다. 번개에 반사되어 반짝이던 검날을 본 것을 끝으로 제블로어는 한동안 깨어날 수 없었다.
그건 꿈이었을까.
끔찍하게도 화창한 날씨 탓에 동굴 안까지 새어 들어온 빛은 제블로어의 눈을 뜨게 했다. 깨어난 그는 얼얼한 뒷머리를 문지르며 라파엘의 부재에 멍해졌다. 그러나 이윽고 꿈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에 가만히 벌어진 제블로어의 입술 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런.”
뿔이 있는 곳을 더듬었으나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라파엘이 쥐고있던 왼쪽 뿔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악마의 심술인가? 생각하던 제블로어는 의식을 잃기 전의 지진을 떠올렸다. 뿔이 없어진 건 황당하긴 했으나 아프지 않았고,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멍해질 때가 아니었다. 제블로어는 항상 녹슬지 않게 정성스럽게 관리하던 검을 쥐고 동굴 밖으로 달렸다. 이때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도 준비해 왔던 것을 향해서.
“제블로어?”
멀리서 뛰어오는 한눈에 제블로어를 알아본 난민캠프의 소녀는 여러모로 놀랐다. 첫째로는 제블로어의 한쪽 뿔이 사라졌다는 것, 두 번째로는 그의 뒤로 많은 양의 무기가 실려 오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은 그간의 일들이 무색하게 제블로어가 구심점 없는 티플링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제블로어의 몸에 밴 일이었다. 그 행위 자체가 제블로어인 것만 같았다.
“서두르게! 지금이라면 피할 수 있어. 싸울 수 있는 자는 날 따라오게! 눈에 띄지 않는 지름길을 안내하겠네. 어서!”
제블로어만큼 일사불란한 지시를 할 수 있는 이도 없었기에 티플링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지휘에 따랐다. 물론 그중 반발하는 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일리시드에게 뇌를 빨려 쓰러지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겁에 질려 제블로어가 가져온 무기들을 집어 들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영부영하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도 제블로어의 몫이었다.
“뛰어!”
제블로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동굴 속에서 청승을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군대를 향해 뛰어가며 제블로어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텅 빈 욕망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이건,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제블로어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다음의 일은 무언가가 끊긴 듯 기억하기 힘들었다.
그저 정신을 놓기 직전까지 검을 휘둘렀던 것 같다. 얼핏 타브와 그 일행을 만나 합류했었던 기억이 스치고, 타브의 웃는 얼굴을 보며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굳혔다. 다양한 적에게 검을 휘두르고 들이받으며 싸웠던 기억이 드문드문 스쳤다. 일리시드의 촉수를 자르고 드래곤들의 발을 그었다. 끈적끈적한 체액따위가 입 안까지 튀어도 닦을 틈은 없었다.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지? 언제까지 숨이 차야 하는 거지? 그렇게 턱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때가 가장 고비다. 제블로어는 군인으로서 오직 숨쉬는 것과 죽이는 것만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잡생각을 잘라냈다. 그러기를 수천번이었다.
더는 휘두를 것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하늘이 맑아졌다.
어느 순간이었는지는 모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잠잠해진 때에, 사위가 고요해지고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전쟁이 끝났다.
‘정말로?’
제블로어는 숨을 고르며 감각을 일깨우려고 용을 썼다.
개죽음까지 상상했다. 아무도 그를 모르고 아무도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해서 무덤도 만들 수 없다 해도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비는 의미로 행동했다. 왜?
‘나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혐오스러운 자신을 죽이는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전에 저질렀던 과오를 다 잘라갔다.
그런데 환호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지금은.
적어도 그 과오가 남아있어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맑은 하늘에 뜬금없이 열을 식혀주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 사이로 옅은 무지개가 떠올랐다.
살아있다.
살아서 이 광경을 볼 수 있다.
“하하…….”
잇새로 웃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뺨으로는 따뜻한 비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웃으면서 울 수는 없을 텐데. 축축한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계속 나왔다.
“제블로어!”
한참이 지나서 어디엔가 쓰러져 누워있는 자신을 흔든 건 그 소녀였다. 악마라고 했지. 분명 나는 악마같은 짓을 했으니까. 제블로어는 멍하게 흐릿한 시야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소녀가 울었다. 나쁜 말을 해서 미안했다며 제블로어의 가슴을 치고 울었다. 그 울음이 따뜻했다.
이러면…….
이러면 된 거야.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감각이 사라져갔다. 아무래도 소녀가 계속해서 누워있는 제블로어의 가슴을 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제블로어는 또다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모여 엄청난 졸음이 몰려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시 에메랄드 숲의 식구들을 만나 근황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한순간이었지만 평화로웠던 숲의 잔칫날을 떠올리며 제블로어는 그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악마인가?
제블로어는 악마가 아니었다. 뿔 달린 동지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들 모두에게 인간이었다. 그건 제블로어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아.’
이제 괜찮은 건가. 이제야말로.
사실 제블로어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정말로, 자신은 악마가 아니라는 걸.
뿔과 꼬리와 등에 있는 날개의 흔적과도 같은 그 모든 겉모습은 중요치 않았다는 걸. 심지어 이제는 한쪽 뿔조차 없는 초라한 악마 같은 모습이라도.
알고 있었음에도 확실한 인정을 받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게서.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고 싶었다. 그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고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제블로어는 그 모든 것들이 인간적이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이젠 알았다.
언제나 혼란 가득한 자신의 정체성에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지금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깨닫기까지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는 나라고. 그걸 일깨운 건 스스로이며 저 자신이 만들어낸 다정한 관계들 덕분이라고.
제블로어는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할 필요가 없어진 그는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