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쳥님_타이포_디자인.png jazz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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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랑채

오리지널 캐릭터, 산티아고(타브)



유산과 정체성


 무더운 여름의 한중간, 에스페란자는 달아오른 인어 선술집 앞에서 후텁지근한 무더위를 견디며 서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라미로는 위층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퇴폐적인 분위기의 선술집은 이제 갓 18살이 된 여자아이의 관심을 끌기엔 한참 부족했기에 그녀는 그저 회색 항구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그마저도 지루해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던 중 가게 옆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니 어쩌니 하는 저속한 농담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가벼이 무시했다.


 “이봐, 거기 뿔쟁이! 너 말이야!”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무례한 호칭에 고개를 홱 돌리자 한눈에도 질 나빠 보이는 사내들이 휘파람을 불어 재꼈다.


 “딱 보아하니 여기 직원인 것 같은데 그렇게 농땡이 부리고 있어도 되나? 시간 남으면 우리랑도 같이 놀지그래?”


 그녀는 한심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항구에 비친 달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날씨는 흐렸지만, 보름달만큼은 구름에 가려지지도 않고 수면에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반면 무시를 당한 사내들은 한낱 악마의 자식 따위가 저들을 무시한다며 저들끼리 소리를 질렀고, 이내 술이 된통 취한 한 녀석이 다짜고짜 주먹을 내질렀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그때 웬 류트 소리와 함께 낯선 티플링 소년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주먹을 내지르던 놈이 인간형 포박 주문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악기 소리가 주위의 이목을 끌었고, 사람들은 웬 어린 여자애에게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으로 굳어버린 사내를 목격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이어지자 그 불한당의 얼굴이 점차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곧 포박 주문이 풀리자 그는 일행들을 데리고 욕을 내뱉으며 잽싸게 자리를 떴다.


 “야? 너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미안해. 아는 사람인 척 도와주려고 한 건데…. 그나저나 정말 찌질한 놈들이네, 괜찮아?”


 소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낯선 이를 구하러 뛰어든 것과 달리 그는 쭈뼛거리며 양손에 류트를 꽉 쥐고 있었다.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그녀와 비슷해 보였고, 옷차림도 그다지 형편이 넉넉한 차림새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은 꽤 봐줄 만 한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스쳐 간 생각을 재빨리 지워냈다.


 “고마워. 도와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아, 그… 그렇지……. 하지만 방금 같은 놈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서……. 음, 혹시 괜찮은 술집을 찾고 있다면 여기보단 엘프의 노래 주점이 더 나을 거야…….”

 “여길 잘 아나 봐?”

 “물론 난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 넌 여기 출신이 아니야?”

 “아빠는 엘투렐 출신이고, 난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자랐어. 도시에는 가끔만 들러. 오늘처럼.”


 소년은 무슨 일 때문에 도시까지 내려온 것이냐 묻는 것이 무례한 일이 될까 고민했다. 그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에스페란자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럼 저녁 동안 나 도시 구경시켜줄 수 있어? 바쁘지 않다면.”

 “지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나도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그녀의 제안을 잠시 고민해보던 소년은 이내 승낙했다. 어차피 오늘 저녁엔 그의 연주를 찾는 이도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이 당돌한 소녀에게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참, 난 마테오야. 마테오 토레스.”

 “난 에스페란자야. 만나서 반가워, 토레스.”

 “넌 이름만 알려줘 놓고 날 성으로 부르는 건 좀 불공평하지 않아?”

 “알았어, 테오. 이러면 되지?”


 멋대로 이름을 바꿔 부르는 데도 마테오는 어쩐지 싫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짧은 애칭이 그녀의 성대를 울리자 뱃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년과 소녀가 처음으로 서로의 세계를 인식한 순간이었다.




 에스페란자와 함께 하게 되면서 마테오가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그녀는 인간뿐인 마을에서 태어난 유일한 티플링이었다. 게다가 드래곤의 기운까지 타고나 마법에 선천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낳다가 죽은 아내를 고향 땅에 묻어두고 아직 어린 딸과 함께 새로이 정착할 땅을 찾아 나섰다. 둘째, 양치기가 게으르다는 것은 모두 세간의 편견이다. 아버지와 함께 목장을 꾸리고 있는 그녀는 새벽부터 일어나 양을 몰고 들판으로 나가거나, 마을의 우물에서 물을 긷거나, 터진 옷을 수선하거나, 일일이 열거하기도 부족한 수많은 일을 해치웠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불평 한마디가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분노하는 순간은 티플링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듣거나 불공평한 일을 겪을 때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마을은 본래 버려진 땅이었던 곳을 라미로가 헐값에 사서 직접 개간한 곳이었다. 처음엔 이들 부녀뿐이었던 곳이 점차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지금은 열대여섯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그중 대다수가 티플링이었고, 다른 종족이 정착을 원한다 하더라도 어김없이 받아들여 줬다.


 마테오는 이런 모습이 너무나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길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였다. 그나마도 재수 없게 악마 혈통이 길거리를 시끄럽게 한다고 썩은 토마토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연주자가 빈다는 이유로 대타로 무대에 서게 된 샤레스의 포옹에서 춤을 추는 댄서 역시 그와 같은 티플링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선정적인 춤에 감탄하면서도 나갈 때는 역시 악마의 핏줄이라 태생이 음란하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지껄였다. 하지만 이 마을 안에서만큼은 그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한평생 떠돌이로 살아왔던 그가 처음으로 정착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영원할 줄 알았던 행복에도 어김없이 끝은 찾아왔다. 본래도 몸이 좋지 않았던 라미로가 결국 딸의 결혼식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뜬 것이었다. 둘은 예정되어 있던 결혼식을 미루고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다. 네버윈터부터 아이스윈드 데일까지 그들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슬픔을 잊기 위해 정처 없이 떠났던 모험은 에스페란자의 배가 서서히 불러오기 시작하며 끝이 났다. 몇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의 모습은 그들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오두막 곳곳에선 비가 새고 바람이 들이쳤으며, 마룻바닥도 곳곳이 썩어 삐걱거리는 음산한 나무 소리를 내었다. 처음 몇 달이야 마을 사람들이 혹여나 그들이 돌아올까 집이 무너지면 보수하고 청소하며 돌봐주었지만, 기약 없이 길어진 여정에 결국 그들도 힘에 부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굴하지 않고 집을 수리하고 모험 중 얻은 유물과 골동품들을 팔아 다시 양 떼를 사들였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갈등은 있었다. 하루는 무리에서 가장 어린 양이 양치기 개를 피해 도망치다 방향을 잘못 든 일이 있었다. 어미 양이 서글프게 우는 소리를 듣고 에스페란자와 마테오는 그 양을 찾아 설산을 헤맸다. 하필이면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라 수색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그러다 마테오가 줄곧 양들 곁에서 연주하곤 하던 음악을 기억해내고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정말 음악 소리에 반응한 건지 절벽 아래에서 메에 하는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마테오는 정신없이 그곳으로 향하다 발을 헛디뎌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다.


 “테오!!”


 에스페란자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염력을 시전해 마테오와 양을 모두 절벽 위로 구해냈다. 무사히 양을 어미에게로 돌려주고 벽난로 앞에 앉은 그녀는 마테오에게 담요를 둘러주며 그를 질책했다.


 “무슨 생각으로 거기로 달려간거야! 내가 못 봤으면 어쩔 뻔 했느냐고.”

 “그래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은걸. 게다가, 어미 양이 너무 슬프게 울고 있었잖아.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섰어.”


 그는 에스페란자의 만삭인 배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만약 그 어미 양처럼 이 아이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비단 절벽이 아닌 더한 곳에도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마저 무모한 아비를 질책하듯 거세게 발길질했다.


 “이거 봐, 우리 아기도 그러지 말라고 하잖아.”

 “미안해. 이제 걱정 안 시킬게.”

 “또 말만 그러는 거지? 하여간 얘가 너는 안 닮아야 할 텐데.”


 그러자 마테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하며 사과의 의미로 류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사과와 연주를 선보이는 모습에 에스페란자도 더는 화내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평화롭고도 어딘가 경쾌한 선율을 따라 온 마을을 뒤덮은 함박눈도 조금씩 그쳐갔다. 에스페란자가 품은 아이에게 산티아고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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