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쳥님_타이포_디자인.png jazz life
  • 홈
  • 포트폴리오
  • 소개
    • 프로필
    • 수상경력
    • 활동이력
  • 문의
돌아가기
이전글 다음글

이별과 재회

산신

라이(타브), 타브(타브), 할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어느덧 죽을 날을 앞둔 라이는 침대에 앉아 인생을 짚어보고 있었다.

 18살, 뿔과 꼬리를 잘라내려는 부모에게서 도망친 후 발더스 게이트에 자리 잡았고, 25살에는 마인드 플레이어에게 납치된 후 연인들과 함께 세상을 구했다. 그 후로 라이스윈 마을에 연인들과 함께 자리를 잡아 아이들을 키웠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을 보기도 했고, 연인 중 한 명이자 같은 티플링인 타브를 먼저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흘러 손주들이 태어나는 것도, 아홉수레 아이가 늙어 죽는 것도 보았다.

 참으로 힘들고 슬픈 동시에 행복한 나날이었지.

 라이는 새삼 그 사실을 곱씹으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겨울, 모든 것이 저물어 가는 계절. 새하얀 눈밭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자기 자신을 보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이런, 방이 좀 춥구려.”

 방에 들어온 할신은 난로에 나무를 넣어 방을 덥혔다. 겨울이건만 나무를 태우자, 방이 봄처럼 따뜻해졌다.

 “할신 믿겨져? 내가 봄을 백번 넘게 봤어.”

 봄을 이제 400번 넘어 500번 가까이 봐온 할신은 그 말을 가만히 들어줬다. 이런 말은 보통 다른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하는 말이었다.


 “있잖아, 내가 환생하려면 어느 신을 믿어야 할까?”

 할신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직 엘프만이 환생하는데 묻는 이는 티플링이었다. 그것도 백 살을 훌쩍 넘겨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늙은 티플링이자 제 연인 중의 한 명, 라이의 질문은 그 의도가 명확했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구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소?”

 “당신은 드루이드지만 엘프잖아, 엘프들은 엘프들만의 사후 세계에 가니… 우리는 죽어서도 만날 수 없을 텐데… 차라리 타브랑 내가 환생해서 다시 만나러 오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실로 다정하고, 집착적이며 낭만적인 생각이었다. 할신은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둘은 아마 티플링 일거야.”

 “다른 종족은 생각 안 해봤소? 이를테면 인간이라던가….”

 “아니, 그 모든 일이 있었어도 티플링인 내가 나니까. 타브도 그렇겠지.”


 라이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할신은 정말로 타브도 그렇게 생각할까? 싶었으나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 산자의 뜻대로 왜곡될 뿐이었다.


 “당신이 너무 외롭지 않게, 꼭 찾아올게.”


 그리고 라이는 일주일 뒤 죽었다. 라이가 타브와 할신 사이에서 낳은 네 자식들과 그 손주들, 라이가 키우고 가르친 동네 아이들 이제는 어른이 된 아홉수레 아이들이 많이 모여 제법 북적거리는 장례식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눈물 흘렸다. 할신은 새삼 다른 연인인 타브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슬펐지. 그러나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타브가 죽었을 때처럼 마음 한구석에 사랑만을 남기고 슬픔은 흘려보냈다. 슬픔에만 빠져 자신을 놓아버리기에는, 할신은 많은 아이의 부모 중 한 명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일단 제일 먼저 할 일은 밥을 해 먹이는 일이었다. 산 사람은 언제나 밥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특히나 아이들은 산 사람 중에서도 밥을 제일 많이 먹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아이들이 먹을 아침을 만들며 할신은 생각했다.

 새삼 고아원을 차린 지도 백 년이 넘어갔다고. 


 처음에는 아홉 수레나 되는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어른들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일메이터와 셀루네 교단에서 사제들이 파견되었고 마을에서도 지원자를 받아 아이들의 부모 자리를 받았다. 그렇게 열 명이었던 보호자들도 단명족들은 세상을 떠나 초기 인원은 세 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제는 고아원 규모가 줄어들어 다섯 명이 운영하고 있었다.


 고아원 아이들의 종족 수도 전과는 달랐다. 예전에는 재해의 피해로 부모 잃은 아이들이 왔다 보니 종족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으나 지금은 티플링들이 유독 많았다. 시간이 아무리 지났어도 티플링에 대한 차별은 아직도 끊이질 않았고 티플링 아이가 태어나면 버리는 부모들은 여전히 많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는 고아원이 있다는 소식에 약간의 인정이 있는 자들은 라이스윈 마을까지 와서 아이를 버리고 갔다. 


 할신은 그것에 대해 아이를 죽이거나 길에 버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어찌 어린아이를 버릴 수 있냐며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수 많은 아이를 제 손으로 기른 아버지로서 입이 썼다.


 또한 티플링 두 명의 연인으로서는 한을 느꼈다. 당신들도 이런 세상에서 버려지고, 도망쳤을까? 라이는 과거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았다가 한번 크게 사고가 났었고 타브는 가끔씩 기침처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툭툭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둘 다 별로 좋지 못한 과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들을 돌봐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니면 내가 당신들을 돌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는 바람과 한만 늘어갔다.


 “할신 아버지, 배고파요~.”

 “맞아요, 배고파요!"

 “야! 조용히 하고 기다려!”

 “아 왜~ 배고프단 말이야~.”


 길어지던 상념을 아이들의 목소리가 잘라냈다. 


 “어이구, 미안하구나. 어서 먹자.”

 

 할신은 음식을 내오며 아이들의 식사를 챙겼다. 아이들의 입으로 음식이 들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할신도 입에 음식을 넣었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지, 먹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그런 매일이 지나갔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원래도 티플링 난민들이 주로 이뤄 티플링이 많았지만 이제 마을은 티플링 마을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티플링이 많아졌다. 이제는 절반이 넘게 티플링이었으며 그 외에는 하프 오크와 하프 엘프가 많았고 그 외 여러 종족이 섞여 있었다. 

 소외되는 종족들을 위한 마을이었다.

 그림자 저주로 인해 그 볼품 없던 마을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제는 아이들이 종족과는 상관없이 웃으며 지낼 수 있는 좋은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을 자체의 힘이 생겨 외부에서도 소외되는 종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발더스 게이트와 물고기와 채소를 거래하는 둥 나름 커다란 마을이 되었다.


 그런 마을을 돌보던 할신은 이제 말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 이제 500살이 넘어가는데, 명상에 드는 시간이 길어졌다. 4시간은 훌쩍 넘었고 어느덧 10시간도 넘어버려 하루가 무척 짧아지고 있었다. 고아원의 부모 자리에서 은퇴해야 하나, 고민이 생기는 나날이었다.


 그런 고민과 함께 할신의 나날은 평범하게 흘러갔고, 명상은 점점 더 길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라이와 타브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제 셋 사이에 태어난 네 명의 자식들도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을 정도이니. 손주들은 자신들을 가르치고 예뻐한 할머니를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들도 지금은 중년을 넘어가는 나이에 마을 밖에 살아 편지나 간신히 주고받는 처지였다. 저번에 받은 편지로는 새로운 고손주가 태어났다고 들었으나 얼굴은 보지 못했다. 티플링이라던데, 누구를 닮았을까? 부모 둘 다 인간인데 육아가 어렵지는 않을까?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얼굴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 중에서도 이제는 장생종들 외에는 라이와 타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자연스럽고 조금 슬픈 일이었다. 전쟁 통에 아는 모두가 죽었을 때와는 다른 잊혀짐이었고 다른 슬픔이었다. 사무치지 않아도 서서히 물드는 슬픔이었다.


 또다시 5년이 지났다.


 그날은 할신이 고아원의 망가진 물건들을 고치고 있던 날이었다. 마을 초기에는 목각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목수 일을 강제로 맡았던 할신은 이제는 어엿한 마을 최고의 목수 중의 하나였다. 

 아무런 상념 없이 나무를 뚝딱거리며 아이들이 망가뜨린 물건들을 고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열린 문을 똑똑 두들기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할신 계세요?”

 “오, 마리 아니오. 무슨 일인가?”

 보호자 중의 한 명인 티플링 마리였다. 마리는 웃으면서 들어왔고 혼자가 아니었다. 마리 뒤에 못 보던 티플링 아이들 두 명이 쭈뼛쭈뼛 들어왔다.

 “할신, 새로운 아이들이 와서요, 인사 시켜드리려고요. 발더스 게이트에서부터 여기까지 둘이서 왔대요. 정말 대단한 아이들이지 않나요?”


 그리고 그 순간 할신은 오랜 약속을 기억해 낸다.


 우리가, 다시 만나러 올게.


 두 명과 똑 닮은 티플링 아이들이었다. 한 명은 다섯 살 한 명은 여덟 살쯤 되어 보였다. 둘 다 길거리에서 떠돌아다니다가 아이들을 돌봐준다는 마을이 있다기에 찾아왔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이름은 라이랑 타브예요. 제가 라이고, 얘가 타브예요.”


 아, 실바누스시여. 위더스, 아니면 누군지 모를 소원을 들어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신은 새삼 생각했다, 고아원을 차려서 정말 다행이라고. 길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거둬 키워 정말 다행이라고. 덕분에 두 명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너희들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신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꽉 껴안았다. 

 아이들을 품에 안으니 티플링 아이들 특유의 높은 체온이 느껴졌다.


 “어서 와라, 오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부터 여기가 너희의 집이란다. 정말로, 너희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단다.”


 정말로, 너희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단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고, 보호하고 싶었단다. 이제까지 갖지 못했던 좋은 것들을 모두 주어 키우고 싶었단다. 

 너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단다.


 아이들은 할신의 많은 소원이 이루어진 줄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게 할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두 명은 타고난 적응력으로 잘 섞여 들었다. 애교 있는 태도로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갈고닦은 센스로 또래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금세 무리의 중심이 된 둘의 모습을 보며 할신은 그저 바라보고 행복해할 뿐이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전생의 연인이 자신이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스스로를 위한 인생을 살았으면 했기에, 과거에 일어났고 이미 끝난 인연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따금 아이들을 보면 미소를 짓게 되기는 했다. 당신들의 어린 시절 얘기들을 들으며 내가 부당한 일들에서 지켜주고 싶었지.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니, 엘프이기는 하나 엘프 사회에서는 살지 않은 할신에게는 이상하고 귀한 경험이었다. 


 다만 숨기려고 해도 둘을 신경 쓴다는 게 티가 났는지 둘은 할신을 어색해 했으며 다른 어른을 가장 좋아했다. 티플링 어른으로 같은 길거리 출신이었기에 말이 잘 통했다. 할신은 그 모습을 씁쓸하고도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 둘이 자라나고 무언가를 배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말년의 커다란 선물이었다.


 우리는 이별하기 위해 한점으로 만나고, 한점으로 만나기 위해 이별한다.


 그렇게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리고 할신의 명상은 20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저씨, 죽어요?”


 운 좋게 할신이 깨어 있을 때 병문안을 온 타브가 입을 열었다. 무례함에 가까울 정도로 직설적인 단어 선택이었으나 할신은 웃었다. 전생의 타브를 똑 닮은 말투였다. 첫날에는 그렇게 센스 있고 착한 아이인 척하더니, 적응한 이제는 영락없이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였으며 그만큼 실수하고 배워나갔다.


 “그래.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단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잠시 이별하는 것일 뿐이니.”

 타브는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할신을 바라보았다. 그 옆의 라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할신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헤어지기 싫으면 어떻게 해요?”

 “그렇다면 현재를 즐겨야겠구나. 추억을 많이 쌓아서 나중에도 돌이켜 볼 수 있다면 헤어져도 헤어지지 않을 거란다.”


 “그래도 싫으면 어떻게 해요?”

 “허허, 헤어지는 게 그렇게 싫으냐?”


 투박한 손이 어린 티플링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라이는 이미 누군가와 헤어져 본 적이 있는 걸까? 할신은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발더스 게이트의 길에서 자란 티플링 아이들이었다, 무엇을 보고 경험했어도 놀랍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 다 슬픔을 감추기 위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왔고 결국 어떤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지금 이렇게 헤어져도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라이, 당신도 이런 기분으로 이런 약속을 했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었으나 결국 자신도 같은 약속을 하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분명히 느껴졌다. 이제는 할신의 차례라는 것을.

 자신을 두고 간 사람들과 똑같이, 이번에는 자신이 두고 떠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할신은 느꼈다.

홀가분하고 씁쓸했다.


 그렇게 일 년 뒤, 할신이 죽었다. 수많은 아이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할신의 연인이었던, 그리고 그 사실은 모르는 두 명의 티플링 아이 둘도 있었다. 그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할신의 임종을 지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오는 어느 날 그렇게 아홉수레 아이들의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버려진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할신은 영면에 들었다.

 모두와 다시 만나기 위해, 아주 기다란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할신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언젠가 다시 만나러 올 거란 사실을 모른 채 라이와 타브는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

 그 셋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데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다.


여러분의 소중한 감상은 참여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