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에 관하여
악성에 관하여
도시 전체를 덮친 일리시드 소동으로 아랫 도시는 한참이나 어수선했다. 윗 도시는 반파되었고 무고한 사람들의 시신을 쌓아 올려 작은 언덕을 만들 수 있었으나 역사서엔 한 쪽을 너끈히 더할 사태가 ‘영웅’의 적극적 주도로 비교적 근시일 내에 수습되었기에 딱 그 정도였다. 수습할 수 없는 혼돈도 무정한 무관심도 아니었다. 죽고 무너진 것들은 빈자리를 남겼고, 주판을 좀 튕길 줄 안다는 놈들은 그 자리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충혈된 눈깔을 부라렸다. 작은 일에 만족할 줄 아는 소시민들은 남의 이야기에 입방아 찧기를 무엇보다 즐겼으며 그로 인한 소문은 때로 여론이 되고 선입견이 되어 수많은 일들을 야기했다.
그리고 악마가 있었다.
그의 첫 번째 기억은 불길과 열기가 넘실대는 붉은 대기였다. 아홉 지옥의 네 번째 층, 춤추는 화염과 대류하는 용암이 바람에 산들거리는 버드나무와 물장구를 치는 호수처럼 일렁이는 곳이 그의 근원이었다.
정오를 조금 앞둔 시간, 그는 신전 앞에 서 있다.
산양처럼 돋은 뿔과 질긴 피막 날개를 자르 성의 무도회에나 어울릴 법한 번질거리는 환영으로 감춘 채였다.
“티플링을 보러 왔소.” 입장은 그 말 한 마디로도 충분했다. 신전의 수도사는 색이 옅은 눈에 경계와 의심의 빛을 띠고서도 옆으로 비켜 서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신성이 매캐하게 자욱한 복도로 자진해서 발을 들였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시선이 따라붙었다. 사제들은 아니었다. 등에 창을 매달거나 검을 짊어진 플레이밍 피스트였다. 도시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으나 설익은 푸딩처럼 흐물해진 대사건 이후의 변화였다. 물리적으로 파손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 대부분의 행정력이 동원되었고, 치안 공백을 노려 불법적인 수단으로 주머니를 채우려는 손모가지가 많았다. 신임 대공, 변방의 검, 젊은 레이븐가드는 그걸 좌시하지 않았다. 전부 잡아들여 합당한 재판 절차를 통해 죗값을 물리며 선량한 시민의 피해를 방지하고자 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피의자가 일정한 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이틀 후 다시 출석하시오’ 따위의 요청을 이행할 고분고분한 성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딜레마였다. 웜 바위 앞에서 그들을 놓아준다면 이튿날엔 더 많은 가정에서 비명 소리가 아침 공기를 찢어 놓을 테였다. 그러나 공명정대한 대공으로선 간편하게 그들의 손목을 잘라 버릴 수도 없었다. 그들은 재판을 기다려야 했다. 결과적으로 감방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창고로 사용되었던 신전 지하의 용도 모를 격실들이 보충적인 구금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였다.
그는 지하의 가장 깊은 방까지 걸어갔다. 통로가 하나 나타날 때마다 그곳을 지키고 선 경비병과 마주쳤다. 그는 마주치는 이들을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세심히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대체로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제블로어.”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늙은 티플링의 이름을 불렀다.
오래 관리되지 않아 들러붙은 먼지와 녹이 각질처럼 일어난 창살 너머로 티플링이 몸을 일으켰다. 지하의 냉기가 그대로 서린 바닥에는 얇은 모포가 깔려 있었는데, 티플링은 흔한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누구시오? 신원을 물어오는 말은 군인의 것처럼 절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피로한 기색이 분명히 묻어났다.
“난 자식을 찾으러 왔어.”
방문객의 대답은 건네어진 물음에 들어맞지 않았으나 티플링 수감자가 필요로 했던 수준의 정보만은 충분하게 제공했다. 제블로어는 방문객의 차림새를 다시 한 번 발끝까지 살폈다. 둥근 귀 인간, 네버윈터식 자수가 놓인 값비싼 원단을 쓴 천옷, 거친 여정에는 적합하지 않은 신발.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시선을 아래로 향하던 그 찰나를 지나왔을 뿐인데도 흐린 안개를 뒤집어쓴 것처럼 이목구비의 구성을 그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최근 들어 고생이 많기는 했다. 뇌기능에 문제가 생기고도 남았다. 제블로어는 그 얼굴을 다시 살피기 위해 시선을 들었다.
젊은 티플링이 서 있었다. 성년을 맞고 난 뒤로 십 년도 지나오지 않았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변장 마법이었나. 티플링을 향한 기존의 멸시에 더해 난민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남은 고타쉬의 유산을 고려하면 면회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블로어는 잠시 뒤 낮은 탄식을 뱉었다. “어린애도 끌려왔소?” 목소리에 묻어나던 피로감의 자리에 당혹과 안타까움이 스며들고 있었다. 모습을 바꾼 ‘그’는 또한 미약한 분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쪽에선 보지 못했소. 다만…….” 늙은 티플링은 감정을 조절하는 데 능하지는 못했으나 상황만은 익숙한 듯 표출을 억눌렀다. 그는 창살 건너편에 갇혀 있었고, 부조리한 상황에 분노가 피어난다 해도 제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심정에는 비할 바가 아니며, 지금 아이를 찾는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같이 화를 내줄 사람이 아니라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제 이름을 누구에게 전해 들었으며 왜 평대가 그토록 자연스러운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드러난 용건 앞에서는 우선순위가 밀렸다.
젊은 티플링은 불길이 일렁이는 눈으로 제블로어를 한참 바라보았다. 서두르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얼마 전에 잃어버린 어린아이를 찾고 있는 부모라면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일 수가 없다. 난민 무리를 지탱하던 제블로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의문을 섞어 더 필요한 것을 물으려던 차에 젊은 티플링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말하는 거야.”
누구나 알다시피, 생물학적으로 제블로어는 자식은 물론 손주를 볼 나이에 가까웠다. 본인을 자식으로 지목하는 어린놈의 방문은 진위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의도를 먼저 가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으로 말하자면-제블로어는 신전에서 성직자를 살해하고 운영 자금으로 쓰일 금화를 한 뭉치 가득 훔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름을 알고 구금 장소까지 찾아온 이상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을 터에 그따위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건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농담이거나, 조롱이거나, 정신 이상자의 망발이거나. 한때 헬라이더를 이끌었던 팔라딘은 선한 쪽을 골랐다.
“머리를 다쳤나?”
“아니.” 상대는 담담히 답했다.
“그럼 쓸데없는 농담은 관두게. 저들이 면회를 오래 허용하진 않을 거야.” 제블로어는 타이르듯 말했다.
“착하게 구는군.” 젊은 방문객의 목소리엔 미약하게 낙담한 기색이 묻어났다. 제블로어는 문득 누군가 머릿속의 장막을 열고 내용물을 들여다본 것만 같은 취약한 감각을 느꼈다. 거죽을 출혈 없이 베어 열고 연약한 속살을 잡아 벌려 손끝으로 더듬는 것 같은 불쾌감이 일었다. 가벼운 두통이 따라붙는 감각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상대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익은 생각 탐지를 들킨 미숙한 주문 시전자의 태도라기보단 고의로 헤집은 티를 내는 것 같았다.
“항의조차 않나?” 그는 기대를 놓지 않은 투로 물었다.
“이 안에서?” 제블로어는 굳은 미간을 미처 다 펴내지 않은 채 반문했다. 성가신 어린 것을 대하는 나이 든 팔라딘의 인내심이 그제서야 드러났다. 방문객은 이번에야 조금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성자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꺼운 가죽 코트를 털어내듯 퍼득이는 소리와 함께 방문객이 날개를 펼쳐 보였다. 좀처럼 바람이 들지 않는 지하 공간에서 피막의 존재감에 떠밀린 공기로 젊은 방문객의 머리카락이 한들거렸다. 이제 지하에 티플링은 하나였다. 제블로어는 자신이 악마를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검을 들지 않았다. 빈손으로 감방에 들어와 애초에 들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당장 허리춤에 날이 잘 선 검이 매달려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악마가 말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악마는 제 핏줄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악마란 족속의 머릿속엔 영혼과 전쟁밖에 없다고 말이야.” 날개 달린 사내는 음울하게 말했다.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겠어. 너희 역사가 말하듯이 우리 중엔 위험한 친구들이 많아. 하지만 언제나 별종도 있는 법이거든…….”
“편견에 대해서라면 걱정할 것 없소. 티플링만큼 그걸 불신하는 부류도 드무니까.”
“아니. 일부는 믿어야 해.” 악마의 목소리에 권태로운 웃음이 섞였다. “우리는 늘 네 영혼을 뽑아다 연료로 태울 생각을 하거든. 다만 네가 내 피를 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는 거야…… 적어도 내 경우엔 말이지. 가끔 나는 혈연관계가 주는 연결감에 지독한 갈증을 느낀단 말이야.”
악마는 에메랄드 숲에서부터 그를 지켜보았다고 했다. 아니, 실은 추락한 엘투렐에서부터 낯을 익혔다고 했다. 이후 개인적 관심으로 페이룬을 유랑하던 중 대기에 묻어나는 유황 증기의 흔적을 좇아 추락한 노틸로이드를 발견했고, 그곳에서부터 이어지는 모험가 무리의 자취를 밟던 중 티플링 난민들을 마주쳤으며, 기억에 남아 있던 얼굴을 찾아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고 했다.
“저주받은 땅에서도?” 제블로어가 물었다.
“인상적이었지.” 악마는 먹이를 잔뜩 삼킨 지하 짐승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제블로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창백한 표정이었다. 방문객은 기꺼이 기다렸다. 제블로어는 얼마 뒤 마른 입술을 떼었다.
“그래서 날 지목했소?”
헛된 꼬임에 넘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내버려서? 수많은 동족들을 사지로 내몰아서? 얼룩진 기억이 티플링의 지친 두뇌에 포말처럼 밀려왔다. 그건 온전히 그의 실책이었고,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온 삶을 다한다 해도 다 갚을 수 없을 죄업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악마를 즐겁게 할 정도였단 말인가. 죄책감과 야속한 기분이 뒤섞였다.
“심히 자책하는군. 그런 이유가 아니야. 난 지금 당신을 탓하거나 몰아세우려는 게 아니거든.” 악마의 목소리는 평탄하게 이어졌다. “생각해 봐…… 레이븐가드의 아들에게 푸른 피부의 악마가 들러붙은 이유를 아나?”
제블로어는 무어라 답하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없었다. 그는 도시를 구한 영웅 중 하나였고 경솔한 이야기에 오르내리게 할 자가 아니었다.
“또 묻지. 그 드래곤본을 현혹하려 하루 종일 주변을 맴돌던 라파엘은 어땠나……. 그를 왕관을 가져다줄 자로 점찍었던 데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고.”
악마는 티플링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고, 그는 오래지 않아 선선히 답을 내주었다.
“그저 눈에 띄었던 거야. 미약하든 창대하든 가죽 자루 속의 핀 하나처럼 튀어나온 이질성이 느껴졌던 거라고. 네 주변의 다른 모든 이들에 비해서 말이야.”
사내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게 특출난 놈들에게 악마가 하나씩 들러붙는 역사적인 이유야. 별다를 게 없지.”
“하지만 당신은 자식 이야기도 했잖소.” 제블로어는 지적했다.
“아, 그렇지.” 사내는 사소한 것을 깨달았다는 투로 말했다.
“생긴 게 닮았어.”
내가 사랑했던 여자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네가 그 아버지를 닮았단 말이야. 악마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의 평온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상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마법적일 정도였다. 이번 것은 논박도 무용했다. 한순간 긴장감을 잃은 제블로어는 당신도 제법 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내뱉을 뻔했다. 관용적인 표현이었을 뿐이나 그 자리의 두 존재 모두에겐 종적으로 우스운 농담거리였다.
그쯤에서 복도 저편으로부터 소란스런 인기척이 들려왔다. 낡고 얼룩진 회색 벽돌로 쌓인 벽면을 타고 소음이 점점 커져왔고 이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고함치는 말소리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악마가 뒤쪽으로 힐끗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들이 알아차렸군.”
“어쩔 생각인가?” 제블로어의 목소리에 어처구니없는 투가 섞였다. 상황을 헤쳐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서 오는 당혹감보단 기껏 변장 마법까지 두르고 들어와선 들통이 났다며 천연하게 말하는 상대에게 기가 차는 것에 가까웠다. 날개를 꺼내 보여주지 않았다면 정신 이상자가 틀림없다 생각했을 터였다.
악마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제블로어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창살 문의 잠금쇠 한 칸 옆을 쥐었다. 그가 바깥으로 잡아당기자 문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열렸다. 여태 두 사람 사이를 굳건히 가르고 서 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녹슨 경첩이 마찰하며 짜내는 삐걱이는 소리만이 흔한 현관에서처럼 귓속을 찔렀다. 이리 나오라고 고개를 까닥이며 청년은 다른 손을 움직여 허공에서 길쭉한 검을 끄집어냈다. 제블로어의 눈은 그 물건의 잘 벼려진 어두운 은색 검신을 단번에 알아봤다.
지옥의 검이로군.
헬라이더를 이끌던 시절 검을 맞부딪혔던 캠비온의 손아귀에서, 또 최근 들어서는 다몬의 대장간에서 이따금 보아 온 것들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었다. 미끈하고 견고하게 마무리된 핸드가드와 사선으로 반들거리도록 손질된 칼날로 보아 이틀에 한 번씩 괴물을 잡는 영웅도 십 년은 족히 쓸법했다. 그리고 제블로어는 실소했다.
“싸워서 나가겠다는 겐가?”
청년은 검날이 향한 방향을 뒤바꿔 들고 건넸다.
“그래. 네가 할 거고.” 그는 태연히 덧붙였다.
“난 전투에는 재주가 없어. 그런 게 있었다면 일찍이 일리시드 포드에서……”
더는 말을 이어갈 여유가 없었다. 통로 끝자락의 좁은 코너를 돌고 쏟아져 들어온 경비대가 시퍼렇게 날선 한손검을 휘둘렀고 때맞춰 몸을 뒤로 피한 청년은 오른팔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대신 어깨에 깊이 패인 절상을 얻었다. 후드득 쏟아진 체액에서 물씬 연기가 피었다.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생물이라면 일으킬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제블로어는 그걸 목격함과 동시에 기현상의 한가운데로 몸뚱이를 던지듯 땅을 박차며 검날을 역으로 휘둘렀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계산을 전제로 한 이성에 앞서 신념을 토대로 오래도록 몸에 익은 습관이 근육을 먼저 움직인 것이다. 칼등이 정통으로 경비병을 후려쳤고 너덜거리는 어깨를 움켜잡은 남자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지금 공격받은 약자였다.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더 많은 군홧발 소리와 고함이 가까워지고 늙은 티플링 전사가 앞장서 길을 뚫는 곳으로.
지하는 굽이지게 꺾여 들어가는 통로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벽면에 바짝 붙어서 코너를 도는 소심한 성정의 수도사라면 몇 번이나 반대편 복도에서 방향을 꺾는 사람과 불의의 충돌을 겪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구조가 지금은 베테랑의 돌파를 돕고 있었다. 코너를 돌아 뛰쳐나오는 도시의 수호자들은 시야각의 맹점에서 암습하는 노련한 검사의 칼날을 한 합도 받아내지 못했다. 비단 실력과 장소의 문제뿐 아닌 여건의 문제이기도 했다. 레이븐가드와 도시와 플레이밍 피스트가 승리하고 악마와 문어와 기생충은 불타며 몰락했던 것이 불과 몇 주 전이었다. 그들은 맹렬하게 용맹에 차 고작 죄인 한둘에 신중을 기할 상태가 아니었다. 애초에 무고한 자가 이런 곳까지 끌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 탈출을 시도하는 그들에게는 다행이라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었다.
다시 칼날이 날아들었다. 악마처럼 붉은 피부를 가진 티플링은 검신을 비스듬히 치켜들어 쇄도하는 칼날을 흘려냈다. 후열로 합류하는 플레이밍 피스트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용병이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조국와 민중을 위해 헌신하는 정석적인 군인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다. 자부심과 용기는 이따금 싹텄지만 그것이 주류라고 할 수는 결코 없었으며 지금은 분노와 혐오가 그들을 지배했다. 바닥에 동료들의 피가 흥건히 흩뿌려져 있었다. 사악하고 비열하며 하찮은 존재, 악마와 피를 섞은 선조의 원죄를 지고 태어난 족속이 마땅히 순종해야 할 처단을 거부하고 감히 정의를 무너뜨렸다. 욕설과 위협이 쩌렁쩌렁 지하를 메웠다. 통로가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제블로어와 사내는 미친 개떼처럼 몰려드는 창끝에 사방으로 포위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지상으로 향하는 출구 직전이었다. 제블로어는 붉게 물든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낯선 이가 본다면 도살자라도 되는 줄 알았겠지만 그 뒤를 걷던 남자는 진상을 알았다. 이 늙은 장수는 도시의 수호자들을 상대로 제압을 무엇보다 우선했으며, 단 하나도 헛되이 살육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가동성을 저해하기 위해 부상을 입히는 것만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하나 묻겠소.” 그때 제블로어가 말했다.
“오는 길에 시체를 봤소. 처음엔 내가 쓰러뜨린 녀석인 줄 알았는데, 분명히 그 밑에 깔려 있더군.”
남자는 별다른 대답 없이 뒤따르며 듣기만 했다. 제블로어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했소?”
남자는 느지막히 대답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당신도 봤잖아.”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소.”
하하. 남자는 그제서야 웃었다. 실은 감출 생각도 없었다. 그는 티플링을 만나기 위해 지하로 들어서며 마주치는 모든 인간들의 피를 성스러운 돌바닥에 칠했다. 경비병들을 몰려오게 한 것부터가 널브러진 시체들의 역할이었다. 애초에 존재적으로 마법을 타고난 악마가 겨우 경비병들과의 전투에서 곤란에 빠질 리가 없었다. 이건 전투라기보단 하찮은 주점 드잡이에 가까웠고, 제블로어는 단지 악마의 존재에 대해 너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편견에 찬 도시민이라면 오히려 이런 수작에는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선량하고 책임감이 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병사들의 악다구니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자비에 기대어 목숨은 건졌으나 발목이 반쯤 썰려 덜렁거리고 옆구리가 찢겨 내장이 흘러나오려는 걸 제 손으로 틀어막은 자들이었다. 남자는 짧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늦었어. 네가 한 일도 주워 담진 못할 거야.”
“나를 속였군.” 제블로어는 말했다.
“어쩌겠어. 약간의 배신감은 받아 가는 게 내 즐거움인걸.” 남자는 태연했다.
그들은 이미 수감소로 기능하던 예배당의 문턱을 나서고 있었다. 아직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으나 어느새 두껍게 구름이 끼어 지저분한 거리를 한층 어둑해 보이도록 했다. 아직 외부의 초소까지 소식이 가 닿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몰려오는 용병단은 없었다. 비밀 없는 지하실이 없고 어디서나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곤 하는 도시, 피로 얼룩진 갑옷을 입고 거리를 걷는 방랑자를 마주쳐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발더스 게이트의 시민들은 수라장을 헤치고 나온 둘의 모습에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쳤다.
제블로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가 꼬임에 넘어가 사람들을 저버렸던 날도 꼭 이렇게 어두웠다. 어둠이 드리운 땅은 어디까지나 그를 쫓아갈 셈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