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영웅이고 다자연애중인 논-바이너리 티플링 바드는 좋아하세요?
전설적인 영웅이고 다자연애중인 논-바이너리 티플링 바드는 좋아하세요?
티플링 바드 영웅인 타브가 그의 엘프 드루이드 남자 친구인 할신, 그리고 티플링 바드 여자 친구인 라이와 함께 발더스 게이트를 구해냈노라. (물론 다른 여러 일행도 있었노라.) 그날부터 발더스 게이트 출신의 바드에게는 이러한 속담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노라.
억압당한 적 없는 영혼이여, 노래를 처부르질 말라!
“나도 바드가 될래!”
“미쳤어?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타브가 테이블에 플루트를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으며 어린 소년의 발언을 단칼에 잘랐다.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옹기종기 모여 앉았던 어린이들이 저마다 마른침과 숨을 삼켰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왜?”
“몰라, 하여간 하지 마. 안 돼.”
소년의 큰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타브는 한숨을 폭 내쉬고 뾰족한 손가락 끝으로 소년의 이마에 난 작은 뿔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울지 마, 이 꼬맹이야. 넌 그냥 내가 바드 영웅이라 동경하는 거야. 금세 다른 게 하고 싶어질걸?”
타브의 목소리는 짐짓 다정한 어른처럼 부드러웠지만 3초도 지나지 않아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타브가 또 울렸어요!”, “할신 아빠!”
“아, 제발! 얘들아! 제발! 아 얘들아 그만!”
엉엉 우는 소년을 번쩍 안아 든 타브가까르르 웃는 아이들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아이, 씨. 뿔이랑 꼬리만큼 음악하기 좋은 게 또 어디 있는데.”
야외에 놓인 나무 테이블은 투박하게 깎아 아직도 거의 자연의 상태에 가까웠다. 타브는 통나무 의자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아이들과 옛 동료들에게 붙잡혀 사흘째 라이스윈에 머물게 된 이후, 자기는 절대 애들과 놀아주지도 않을 거고, 지붕 아래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스타리온이 코웃음을 쳤다. 아스타리온은 안전하게 그림자가 진 방 안에서, 상체만 창틀에 슬쩍 기대어 있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된다고 해도 될 것 같아?”
“왜 나한테 물어? 그런 건 티플링으로 살아온 네가 훨씬 잘 알 것 아냐.”
“그렇지만 난 플루트를 잡기 전까진 도둑이나 다를 바 없었단 말야.”
타브는 24년 티플링생 최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도시와 세상을 구한 영웅 타브처럼 발더스 게이트에서 환영받는 유명한 바드가 되고 싶다고 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은 꿈을 갖는 게 일이고, 하루에도 다섯 번씩 되고 싶은 게 바뀌어야 옳았다.
문제는 소년이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계속 바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데에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애가 티플링이라는 점에 있었고, 제일 큰 문제는 타브는 한 번도 스스로 바드가 되고 싶어서 플루트와 류트를 잡은 적이 없었다는 거였다.
“아하, 그러니까 네가 여섯 살까지는 로그였다고?”
“그렇지!”
타브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도록 튕겼다.
“그러니까, 도둑을 거치지 않은 티플링은 어떻게 인기를 얻어야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군? 그걸 하이엘프인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자기야?”
아스타리온이 한층 더 기막혀하며 타브의 짙은 핑크빛 얼굴, 배배 꼬아진 뿔, 흔들거리는 길고 뾰족한 꼬리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아니, 내 말은, 넌 로그가 되기 전까진 발더스 게이트에서 꽤 멀쩡하게 살았잖아?”
타브가 ‘멀쩡하게’를 강조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가 웃지도 않고 말하자 아스타리온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얘가 지금 제정신으로 나한테 이런 소릴 하는 거니? ‘멀쩡하게 살았’다고? 할신, 들었어? 지금?”
키가 작은 티플링의 이마를 검지 하나로 꾹 짓누른 아스타리온이 고개를 들어 할신에게 물었다. 할신은 어깨 위에 올린 어린이를 한번 추어올리곤 곤란한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는 흥,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뒤로 물러섰다.
“저 어린 뿔쟁이들이 뿔쟁이라고 욕 먹는 게 싫거든 평생 여기서 살게 하면 되잖아? 문명이고 문물이고 어차피 너희는 그 좋은 거 관심도 없으면서.”
“고인물!”
타브가 벌떡 일어나 아스타리온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아스타리온이 능청스러운 말투로 즉시 대꾸했다.
“고인물의 좋은 점이 뭔지 알아? 썩었다는 걸 자기들은 모른다는 거야. 새 물이 안 들어오면 그만이라는 거지.”
“아이 씨, 자꾸 맞는 말만 하지 마, 아스타리온. 도움이 안 되잖아.”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타브가 원래부터 새집처럼 잔뜩뻗쳐 있던 머리를 스스로 마구 헝클었다.
“나한테서 이런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드는 게 잘못된 거야.”
아스타리온은 창틀에 다시 기대었다. 사실이었다. 물론 그 역시 ‘차별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이건 전혀 사정이 달랐다.
“네 여자 친구한테는 안 물어봐?”
타브가 입을 삐죽였다.
“걔한테 이런 걸 물어보긴 싫어.”
“내가 얘기해줄 수 있는 건 말야, 자기야.”
나긋한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이렇게 말했다.
“일단 이 마을에서 한 발짝이라도 멀어지는 순간 저 노움 반쪽만 한 꼬맹이들은 바로 사악하고 더러운 뿔쟁이, 교활한 악마의 후손, 버르장머리 없고 손버릇 나쁜 저주받은 애새끼가 될 거라는 사실이야. 그게 진짜든 아니든 말이지.”
“물론 그대 말이 틀린 건 아니오. 그렇지만 애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줄 수는 없소.”
어느새 어린애들을 모두 놀이터에 놓아주고 온 할신이 끼어들었다.
타브는 심란한 표정으로 네 개의 꼬리와 여덟 쌍의 뿔,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일고여덟 얼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하나하나 다 똑같이 귀엽기가 짝이 없구만.
“그래도 너만이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 거 아냐? 진짜 티플링은 너야, 타브 자기야.”
아스타리온이 다독이며 이렇게 말하자,
“우와, 그거 되게... 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멋진 해답이다, 아스타리온.”
무심하고 무신경한 대답이 돌아왔다.
“짜증 나게 좀 굴지 마. 여기 너처럼 티플링 인생을 정석으로 살아온 티플링이 또 어딨다고 그래. 저 새끼 악마들은 자기가 악마의 새끼인 줄도 모르고 순진하게 자라는데.”
아스타리온이 놀이터에서 서로 뿔을 잡고 소싸움을 하듯이 다투는 티플링 어린이 두 명을 가리켰다. 타브의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할신이 헐레벌떡 일어나 놀이터로 뛰어갔다. 그가 자리에 앉은 지 약 2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와, 애들 키우는 거 진짜 쉽지 않다니까. 난 죽어도 절대 저 역할은 안 맡아야지.”
“수레 아홉 대나 되는 애들을 감당하겠다고 한 건 너희잖니. 뭐, 어차피 자기는 가서 부추기기밖에 더 해?”
아스타리온과 타브가 낄낄 웃었다. 할신이 소리를 빽빽 지르기 시작한 어린애 두 명의 목덜미를 각각 한 손에 쥐고 들어 올리며 타이르는 동안 타브가 류트를 들고 일어났다. 가열차게 튕기는 류트 현 소리가 아이들 목소리 사이를 가로질러 파고들었다.
딩디리링디딩딩리링딩!!!
“야! 얘들아! 음악 시간이다!”
류트를 들고 달려가는 타브의 뒷모습에 대고 아스타리온이 웃음소리를 픽 흘렸다.
“쟤도 보모가 다 됐네.”
음악 시간이 끝난 뒤 저녁을 먹고 세 시간을 더 고민한 후, 타브는 이 모든 사건의 근원이 스스로 올바른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타브는 음악을 잘했다. 그러나 그게 타브가 바드가 되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이루는 것들과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타브는 키가 작았다. 그는 힘이 세지도 않았고, 뛰어나게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여자도 남자도 아닌 것으로 정의했다.
그에게는 검은 뿔과 뾰족하고 긴 꼬리가 달려 있었고, 얼굴 곳곳에 검고 뾰족한 무늬 같은 반점을 가진 채 태어났다. 아마도 그의 부모는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딸도 아들도 아닌 아기를 이름도 없이 버렸으리라. 원래 발더스 게이트에서는 그렇게 버려지는 티플링 아기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타브는 오히려 자신이 티플링이라는 것이 억울하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티플링 소년이 바드가 되어서 도시에 가 인기를 얻고 싶다고 하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고? 정말이지 모순 그 자체였다. 타브는 자기 머리털을 양손으로 또 쥐어뜯었다.
방문이 덜컥 열리고, 문틈 사이로 라이가 물었다.
“타브, 안 들어오고 뭐 해? 얼른 자자.”
“나는 쓰레기 양육자야.”
“…할신, 잠깐 나와봐야 할 것 같네.”
“알았소.”
할신이 라이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한 엘프 남자와 한 티플링 여자와 한 티플링 논-바이너리가 부엌의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타브,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요?”
“네가 아이들을 울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니?”
할신의 말에 타브가 으으-하고 끓는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테이블 위로 쾅 엎어진 타브의 등에 라이가 손을 올려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고뇌에 빠진 한 연인을 가운데에 두고 두 연인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타브가 얼굴을 쥐어뜯다가 상체를 홱 들어 올렸다.
“잘래. 졸려.”
“거짓말.”
“안 되오.”
타브가 입을 열자마자 할신과 라이가 동시에 질책했다. 타브가 “이잉!” 소리를 내며 다시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짙은 분홍빛의 두 주먹이 나무 식탁을 탕탕탕 내리쳤다. 양쪽에 앉은 연인들이 타브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척 꼭 쥐며 못 하게 했다.
“자, 이제 솔직히 말해 봐, 타브.”
“그냥 세상을 지배할 걸 그랬어.”
“솔직하게 말한 건 좋소.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해보는 것이 좋겠소.”
창밖으로 흐린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타브는 짧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밤을 새워야 할지 잠깐 고민한 뒤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가 도시 출신인 거 너희 다 알잖아.”
“그러니까… 그 애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는 거지? 우리처럼.”
라이의 이마에는 검은 뿔 한 쌍이 나 있었는데, 타브는 그 색과 모양을 꽤 좋아했다. 라이는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희었지만, 뿔은 강렬한 검은 색이었다. 타브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신이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타브,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아이들로 남을 수는 없소. 물론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아쉽소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라오.”
“하지만.”
“그대라면 어떨 것 같소?”
“나?”
“그렇지. 그대가 아주 어린 아이고, 하고 싶은 게 있소. 그런데 누군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하겠소?”
티플링이자, 바드이자, 영웅이자, 논-바이너리,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 청년은 다시금 이렇게 생각했다. 마음은 여릴수록 굳은살이 박이지 않는다고. 상처는 받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잠시 고요한 정적 사이에 숨소리만 흘렀다. 두 연인은 참을성 있게 타브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난 그래도 하고 싶은 건 해야 한다고 생각해.”
“너답지 않게 엄청 소심하게 말하네, 타브.”
라이가 웃었다.
“그렇다고 못된 말을 들으면 불이나 지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내가 대신 질러줄 수도 없고!”
투덜대는 타브를 내려다보는 할신과 라이의 표정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이런 걱정을 하는 걸 보면 그대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니겠소.”
“진~짜 싫어.”
“그럼 내일 가서 솔직히 말하고 사과하자. 알았지?”
“으응.”
할신과 라이가 그들의 더 어린 티플링 연인의 등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세상이 순식간에 변할 리도 없었고, 선량한 독재자가 사람들의 머리통을 하나하나 다 지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적어도 라이스윈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다, 회복되고 있었다. 보이는 상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도 모두 그랬다.
다음날 아침 타브와 놀이터에서 대면한 어린 티플링 소년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나 드루이드 될래!”
타브가 이마를 탁 쳤다.
그래라, 요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