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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엘투렐

털털톨톨

제블로어



엘투렐이 추락했다.

위대한 팔라딘의 도시는 지옥 한복판에 떨어졌고,

악마 닮은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싹텄다. 

늙은 헬라이더 사령관은 도시를 구해야만 했다.


※ 이 글은 < 발더스게이트3 >의 직전 이야기인 DnD의 시나리오북 < 아베르누스로의 하강 >의 공개된 줄거리를 바탕으로 상상하여 쓴 소설로 가상의 인물 평론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시나리오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혹시 모를 스포일러를 방지하고 싶으신 분께서는 해당 시나리오를 읽거나 플레이하신 후 일독해 주시기를 권장해 드립니다. ※


 1. 제블로어라는 팔라딘


 제블로어는 헬라이더 역사상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는 팔라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티플링 팔라딘에게는 여러 얼굴이 있다. 많은 문헌과 증언 속에서, 그는 고향 도시를 구한 위대한 헬라이더 영웅이 되기도 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동포를 배신한 비정한 지도자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몇몇 기록에서는 그를 ‘이렇다 할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정치 싸움에서 밀려난 비운의 기사’로 묘사하곤 한다.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나, 제블로어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그만큼 그의 삶에서 다양한 면모가 관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5세기 페이룬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온갖 사교와 흑마법이 판을 치던 그 시기 말이다.


 엘투렐과 발더스게이트 같은 굵직한 도시들이 겪은 몇몇 대사건들은 그 당시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방증한다. 페이룬 역사가들 사이에 가장 애호되는 1492년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 해 엘투렐이라는 위대한 도시는 하루아침에 아베르누스로 추락했다가 가까스로 부상했고, 발더스게이트는 삼악신과 엘더브레인의 농간에 휘말려 도시는 물론 온 페이룬이 마인드플레이어의 식민지로 전락할 뻔한 위기를 맞이했다. 얄궂게도 제블로어는 이 두 사건을 모두 겪었다. 그야말로 운명의 소용돌이에 있는 대로 휘말린 셈이다.


 한 개인이 온 대륙을 뒤흔들 만한 비극을 연이어 경험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여러 사건을 감당하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의 성격, 태도, 사상, 생각 중 어느 부분이라도 큰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제블로어와 같이 독특한 배경을 가진 기사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시련은 언제나 사회의 가장 연약한 곳을 베는 법이며, 평민 출신의 티플링 팔라딘이었던 제블로어는 설령 그가 아무리 위대한 신정 도시 엘투렐의 사령관이 되었다고 해도 완전한 사회적 강자의 삶을 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제블로어는 그러면서도 여러 집단의 지도자 노릇을 했다. 내성적이고 보수적이던 그 티플링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것이 제블로어에 대한 평가가 그토록 다면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그 혼돈의 시기를 살았던 ‘개인’으로서의 제블로어에 대한 조명은 그다지 활발하게 논의된 바 없다. ‘지도자’로서의 그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해 서술한 저서가 몇몇 발견되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을 본격적으로 주제 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한 사람의 티플링으로서의 ‘제블로어’에 글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특히 1492년 ‘엘투렐의 지옥 하강’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해 나가고자 하는데, 이는 고향을 구한 영웅이자, 고향에서 버림받은 난민의 지위를 동시에 획득한 바로 그 시기야말로 제블로어의 가장 극적인 면면이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2. 엘투렐의 하강


 1492년 엘투렐은 끔찍한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아베르누스의 대공작, 자리엘의 사특한 마법으로 인해 문자 그대로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온 도시를 내리쬐던 거대한 인공 태양, ‘컴패니언’이 힘을 잃은 이래, 엘투렐은 단 한 번도 그 음울한 어둠의 베일을 벗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지옥 한복판에 떨어진 도시의 운명이 으레 그러하듯이. 엘투렐 출신의 바드인 ‘멋쟁이 크누트’는 워터딥에 사는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당시 도시가 처한 배경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도시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네. 아래로는 시커먼 강물이 넘실거렸고, 위로는 새빨간 유황불이 긴 혀를 날름거렸지. 인구가 만 명이 넘는 대도시는 아베르누스를 관통하는 거대한 망자의 강, 스틱스강 한가운데에 매달려 있었고, 도시를 지탱하는 것은 성을 사 방향으로 부여잡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쇠사슬이었네. 스틱스 강변에서부터 뻗어 나온 그 거대한 사슬들은 위대한 도시를 사로잡은 족쇄이자, 도시가 침몰하지 않게 붙잡고 있는 유일한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네. 그러나 도시는 무거웠고, 지옥의 삿된 마법으로 마감된 거대한 사슬 역시 날로 무거워졌네. 위대한 도시가 가라앉는 건 시간문제였지. 나는 아직도 매일 밤 수백 미터에 달하는 그 거대한 사슬들의 포효를 기억하네. 그것은 천둥소리 같기도 했고, 차마 가늠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괴물의 울음 같기도 했다네. 그럴 때마다 온 도시에는 맹렬한 불안의 파도가 일었네. 모두가 알았기 때문일세. 그것이 종말의 초읽기라는 것을….’

 엘투렐 평의회는 도시의 지옥 하강이 도시와 자리엘의 계약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신원 미상의 누군가와 자리엘이 주고받은 편지 몇 장과, 연일 엘투렐을 밝히던 인공 태양이 실상 자리엘이 선물한 물건이었다는 사실이 그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설령 이것이 사실로 증명된다고 한들 뾰족한 도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사이의 계약을 파기해야 했다. 가까스로 발더스게이트와 엘투렐 출신의 용감한 젊은이 넷이 그 임무에 자원했지만, 그런다고 위험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리엘을 설득하든, 계약을 파기하든 간에, 그 소박한 원정대는 수만에 달하는 악마 대군 사이를 지나쳐야만 했다. 설령 무사히 성에 도착한다고 한들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성의 주인, 자리엘은 그리 관용적인 악마가 아니었다.


 ‘원정대를 보낼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엘투렐 마법사 협회장이던 윔블턴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은 아직 악마들이 적극적으로 엘투렐을 침공하지 않았으니 자리엘의 심기를 애써 거스를 것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정말 확실한 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도시의 안전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블로어와 페테르 블랑 같은 군인이나 지옥 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도시의 몰락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악마들, 특히 자리엘처럼 교활한 악마는 아무리 비위를 맞춘다고 한들 ‘가소로운 필멸자들’에게 관용을 보이지 못하리라고 보았다. 양측의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한 도시와 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의 운명이 걸려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이홀의 대회의장에서 사흘 밤낮 동안 끝없는 토론이 이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점점 스틱스강으로 가까워졌다. 하이홀 회의록에 제블로어가 등장한 건 바로 그 시기였다.

 

 엘투렐이 아직 지상에 있을 무렵만 하더라도, 제블로어는 알려진 지옥 토벌 기병대(Hell rider) 대장 중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로 손꼽히곤 했다. 그의 생전 입버릇처럼 ‘정치는 군인의 몫이 아니’라는 소신 때문이기도 했고, 그 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박해받던 티플링 출신이라는 점도 그가 의회를 멀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대회의장에서 목소리를 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엘투렐 시민과 티플링 난민 시기를 함께 보내며 동고동락했던 그의 부관, 틸시스는 그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회의장에 만연하던 무의미한 기싸움을 깨트린 건 익숙한 발소리였다. 묵직한 철제 군화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혔다가 떨어지는 소리. 그 규칙적인 걸음걸이! 그것은 틀림없이 잘 훈련된 군인의 것이었다. 나는 보았다. 악마의 그것처럼 길게 뻗은 꼬리와 붉은 피부, 이마 위로 솟은 검은 영양 뿔, 툭 불거진 눈썹뼈 아래 붉게 타오르는 동공을. 제블로어였다. 갑옷 입은 그 늙은 티플링이 타는듯한 눈으로 의원들을 쏘아보자, 회의장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연설을 시작하는 그의 말씨는 지극히 군인다웠지만 엘투렐 예법을 크게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제블로어에게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은 바가 없다. 엘투렐 군인 시절 그가 일기를 썼다는 사실은 동료들의 증언과 편지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었지만, 실물 자료는 그가 엘투렐로부터 추방되면서부터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하이홀 회의록을 살펴보면 얼마쯤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제블로어(헬라이더 사령관): (발언한다.) 도시는 날로 침몰하고 있고, 악마 군대는 점점 다가오고 있소. 아니, 실상 그들은 어디에나 있소. 스틱스강에는 끔찍한 심연 고기(Abyss Fish)와 기억 잃은 망자가 우글거리고, 강 너머와 상공에는 우리 피와 살을 노리는 악마들이 즐비하오. 식량 창고는 곧 바닥을 보일 것이오. 무기 역시 그렇소. 아직 엘투렐을 지키고 있는 견고한 방어 마법도 마법사들의 힘이 다하면 머지않아 무용해질 것이오. 지금이 아니면 군사를 일으킬 수 없소.


페테르(티르 팔라딘): 그렇다면, 제블로어 사령관, 당신의 말은 역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제블로어: 그렇소.


페테르:  어떠한 성공도 보장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까?


제블로어: 이미 우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소.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우리 앞에 놓인 미약한 희망이나마 쫒아가는 길뿐일 것이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소.


윔블턴(엘투렐 마법사 협회장): (이의를 제기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티플링은 자리엘의 의도대로 우리 엘투렐을 자멸시킬 속셈인 것이 틀림없소!


제블로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우리 도시를 자멸케 하는 것이, 이 도시를 오래도록 지탱해 온 무고한 시민들일 것이라고? 천만의 말씀이오! 도시를 자멸케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포와 비겁함일 것이오. 목숨 잃는 것이 두려워 동료를 팔아넘기고, 잇속 채우기에 바빠 이웃을 마녀사냥하는, 그런 혼란 말이오!

물론, 이 지옥 땅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배신자들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오. 그러나 배신은 뿔 있는 자와 없는 자, 귀가 뾰족한 자와 둥근 자를 가리지 않고 있었소. 사흘 전 용암 악마에게 딸을 판 험프리 경에게는 꼬리가 있었소? 아니, 그는 평범한 실드 드워프였소. 지난밤 스틱스강 괴물에게 동료를 먹이 주었던 배신자는 흰 피부에 뾰족귀를 가진 하이 엘프였지. 외모만으론 배신자를 색출할 수 없다는 이야기요. 우리는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오.
 
 그날, 그 회의장에서, 헬라이더 사령관은 강경 보수파로 정평이 나 있던 마법사장 윔블턴과 정면으로 충돌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엘투렐에 닥친 혼란에 대한 상반된 의견에 기인했다. 그 시기에, 몇몇 엘투렐 시민들 사이에서는 ‘대악마 자리엘이 수백 년간 이어진 데몬† 과의 대전투를 위해 엘투렐을 이용했다’는 견해가 만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몬들이 자리엘의 성에 접근하려면 스틱스강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불운하게도 엘투렐은 그 정중앙에 매달려 있었다. 진격하던 데몬들은 매번 지상민들의 육신과 영혼의 달콤함에 이끌려 엘투렐로 흘러들었다. 엘투렐은 포식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검을 뽑아야 했다. 다시 말해, 엘투렐은 그 자체로 거대한 미끼이자 방패 노릇을 한 셈이다.


 이것은 엘투렐의 티플링들이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지옥 토벌 기병대’라는 이름이 수백 년 전 아직 악에 채 다 물들지 않은 자리엘과 함께 ‘지옥 토벌에 나선 기사들’에 기인한 것을 빌미로 지옥 토벌 기병대와 자리엘을 연관 지었고, 지옥 토벌 기병대의 일부를 차지하는 티플링 기사들을 모욕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의혹 혹은 모욕은 이윽고 기사단과는 전혀 관련도 없는 티플링들에게까지 번져 나갔다. 악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티플링들을 멸시하던 그 옛날로 온 도시가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고개를 든 것이다. 


 그 시기 엘투렐에서 벌어진 티플링-비티플링 간의 다툼에 대한 기록에 제블로어의 이름이 중재자로서 자주 거론된 것은 그가 그 당시 벌어지던 이러한 혐오 현상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발전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회의록의 또 다른 대화에서도 그의 이러한 판단이 드러난다.
 
윔블턴: 당신네 족속들이 우릴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누가 한단 말이오? 


제블로어: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전쟁은 엘투렐 모두가 직면한 문제이고, 설령 당신이 우려하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지옥토벌 기병대의 명예와 긍지를 걸고 나, 제블로어가 그를 베겠소. 헬름의 한 쪽 눈에 걸고 맹세하오.
 
 엘투렐 티플링들에게 쏟아지는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 제블로어가 채택한 전략은 티플링의 무해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티플링들이 얼마든지 혈관에 흐르는 악마 피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그들이 얼마나 선량하고 신실한 시민일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그가 헬리온‡이던 시절부터 사령관 자리에 오르기까지 일관되게 고수해 왔던 방침이기도 했고, 엘투렐이 티플링들을 포용하기 이전에 내세웠던 조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은 얼마쯤 먹혀들었다. 윔블턴을 비롯한 반대파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원정대 파견 사실을 감추고 악마의 이목을 끌기 위한 전투를 준비하자’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온 도시에 소집령이 떨어졌고, 엘투렐의 임시 총사령관은 다름 아닌 제블로어였다. 그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엘투렐을 생각하는 기사라면 으레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전략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 여기서 말하는 데몬(demon)이란 데빌(devil)과 구분되는 악마 종족을 일컫는다.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그들이 데빌들에 비해 무질서와 혼돈을 더 애호한다는 점에 있다. 자리엘은 타락 천사 출신의 데빌로 데몬들과의 전쟁을 숙원으로 삼고 있었다.

‡ 정의의 신 헬름의 별명





 3. 엘투렐의 티플링

​

 그 당시 제블로어의 부관으로 일했던 틸시스는 제블로어의 판단에 의문을 품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헬리온이던 시절부터 제블로어를 동경해 왔던 그 티플링 청년은 훗날 제블로어가 ‘동포들의 배신자’로 낙인 찍히고 나서도 그에 대하여 얼마쯤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제블로어가 취했던 유화 전략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회고를 한번 살펴보자.

 

 ‘(전략) 나를 난감하게 한 건 내 꽁무니를 쇠파리처럼 따라 다니던 어떤 의문들이었다. 그것은 내 상관과 내 고향 도시 자체에 대한 회의(懷疑)였다. 나는 제블로어 사령관을 무척 존경했지만, 그가 약속한 바가 정말로 지켜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배신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그중에 혹여나 티플링이 한 사람이라도 끼어 있다면, 그 약속은 쉬이 무너질테고, 그렇게 되면 티플링들에 대한 낙인이 심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의 무결함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도시는 약속된 관용을 우리에게 베풀 것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젊은 성기사들에게 엘투렐은 일종의 기회와 증명의 땅이었다. 설령 가장 비천한 출신일지라도 능력만 증명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정의롭고 공정한 팔라딘의 도시 말이다. 제블로어는 그러한 신화의 중심에 선 남자였다.


 그 옛날, 아직 뿔과 꼬리 달린 사람들이 지독히 멸시당하던 시절에, 가장 평범한 마구간 지기의 가장 평범하지 않은 아들로 태어나 지옥 토벌 기병대의 기사가 된 사내의 이야기는 수많은 티플링 꼬마들을 헬라이더를 꿈꾸게 했고, 엘투렐이 악마 닮은 사람들도 차별 없이 영웅이 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퍼트렸다. 이것은 그가 엘투렐 티플링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제블로어의 성공 신화는 분명 엘투렐 티플링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사회 진출을 꿈꾸게 했다는 점에서 분명 유의미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 중 하나는 ‘이것이 한 집단이 이질적인 다른 집단에 녹아들기 위한 초기 전략으로서는 적절할지 몰라도, 그들이 사회의 실질적인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전략으로 아주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라마지스 탑의 롤란은 그의 저서 < 엘투렐의 그림자 >에서 그러한 성공 신화의 맹점과 엘투렐의 위선을 맹렬하게 꼬집었다.


‘몇몇 순진한 사람들은 엘투렐이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위대한 기사들의 도시였고, 엘투렐의 분열은 아베르누스로의 하강 사건이 있고 나서야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제블로어가 헬라이더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그만큼 티플링이 그만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가 사령관이 되고 나서도 뾰족하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도시의 ’마스코트‘나 다름없던 지옥 토벌 기병대에서는 그나마 티플링들을 자주 기용했다지만, 그뿐이었다. 뿔 달린 사람들의 승진은 여전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너덧 배는 까다로웠다. 특히 윔블턴 같은 자가 총장 자리에 앉아 있던 엘투렐 마법사 학교에서는 온갖 핑계를 대며 티플링 학생을 뽑기를 거부했다. 재능도, 노력도, 명백한 유리천장 앞에서는 무력했다.’


 롤란이 언급한 것과 같은 티플링 차별은 ‘아베르누스로의 하강’ 시기에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 무렵 도시 곳곳에는 이미 증오의 그림자가 가지를 뻗고 있었다. 제블로어가 회의장에서 목소리를 높인 다음에도 몇몇 의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악마와 내통할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에 대한 감시를 증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 임시 재판소에 넘겨진 사건 중에는 식량 배급줄을 서던 티플링 노인이 티플링 아닌 사람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한 건, 티플링들에게 임시 대피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직원에 대한 민원 등이 다수 보고된 바 있다. 티플링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을 되찾고자 했던 제블로어의 의도와 요청과는 달리, 뿌리 뽑히지 못할 혐오가 버젓이 자리 잡은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는 제블로어가 ‘티플링의 영웅’이라는 별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를 고수하였다고 본다. 아샤 콘웰 같은 급진적인 티플링 사상가들은 제블로어가 비-티플링들의 눈치를 보느라 굴욕과 모욕을 감수하기까지 한 위선자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며, 그의 행보는 훗날 달오름 탑에서 그가 동포를 저버리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리라고 보았다. 분명 제블로어의 행보에는 많은 비판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앞서 한 번쯤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그가 티플링들의 ‘티플링다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며, 그 시기의 엘투렐이 종족 차별과 같은 내부적인 문제보다 구울, 뱀파이어 등을 비롯한 언데드 군단 혹은 (아베르누스로의 하강 시기에) 악마에 대해 대적하는 것을 최우선시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무렵 엘투르가드†의 수장이던 티베리우스 크리그는 외부 세력, 이를테면 삿된 마법을 일삼는 자들과 그들의 피조물들로 구성된 ‘악한 무리들’로부터 도시를 방호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투렐 시민성’과 ‘위대한 팔라딘의 도시’라는 표현들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오늘날에야 그것이 크리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시민들을 하나로 결집하고, 나아가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중요한 표어 혹은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하물며 제블로어는 헬름의 팔라딘이었다. 원리원칙(설령 그것에 문제가 있더라도)을 중시하는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였다.


 제블로어의 이러한 미온적 태도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그의 출신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평범한 인간 마굿간지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랫동안 발현되지 않은 옛 조상의 악마 혈통이 그의 대에서 발현되고 만 것이다. 그 당시에도 엘투렐에는 티플링이 살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모범 삼을 만한 티플링 영웅에 대한 일화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다. 악마 닮은 외모를 감추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 젊은 제블로어가 ‘티플링다움’보다는 ‘엘투렐 시민다움’을 더 우선시하고, 그러한 막연한 이상에 순진할 정도로 스스로를 꿰맞췄던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 분노의 신 토름을 섬기는 신권 국가로, 페이룬 서쪽에 있다. 수도는 엘투렐이다.




 4. 대 아베르누스 전투


 몇몇 티플링들의 우려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던 티플링들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도시를 구하기 위한 눈속임 전쟁은 차근차근 준비되어 갔다. 수십 년간 전장에서 활약한 노장은 아베르누스로 추락한 삼천 명의 정예군을 훈련 시키고, 천여 명에 달하는 예비군을 소집해 하이홀을 방호하도록 했다. 인페르널 워 머신(Infernal War Machine)이나 사로잡은 악마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전력으로 활용하였기도 했다. 악마들을 도발하기 위해 엘투렐 성곽 서쪽에 악마 대가리를 장대에 걸어 놓으라고 지시한 것도, 자리엘의 성으로 파견된 원정대에게 신선한 악마 가죽을 뒤집어쓰고 가라고 제안한 것도 바로 그였다. 위대한 경비병의 팔라딘으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성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만 마리에 달하는 데몬 군단이었고, 실패는 곧 도시의 종말로 직결될 것이었으므로, 제블로어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그러한 상황의 고단함에 대해 제블로어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몇몇 병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느꼈을 대단한 부담감을 엿볼 수 있다. 틸시스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처럼 기록했다.

 

 ‘제블로어의 집무실이자 ‘대 아베르누스전의 임시 사령부로 쓰이게 된 그곳에서는 전쟁이 시작되는 그날까지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따금 마법협회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고, 협조, 협력, 배신자, 믿음 따위의 불특정한 단어들이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다음 보고를 하려면 그 문이 열리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면, 불만족스럽거나 근심스러운 얼굴을 한 몇몇 상원의원들의 얼굴을 보였고, 마지막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늙고 지친 티플링 하나였다.’


 제블로어는 원정대 파견과 전쟁의 날이 밝을 때까지도 끝없이 내부의 적과 협상해야 했다.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윔블턴을 중심으로 한 엘투렐 마법사 협회였다. 대규모 적을 상대하고, 엘투렐을 성공적으로 수성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들의 조력이 불가피했는데, 예전부터 헬라이더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보수파 귀족들이 자신의 마법사 부대를 내어주길 꺼렸던 것이다. 하여 제블로어는 수없이 많은 설득과 회유를 감행해야 했다. 윔블턴이 자기 동생에게 ‘제블로어 사령관은 전쟁을 빌미로 온 엘투렐의 유산을 거덜 내려고 하며, 그를 위해서는 그 사나운 티플링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는 내용을 쓴 것으로 보아 얼마쯤의 협박도 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결전의 날은 왔다. 준비를 마친 원정대는 자리엘의 계약을 파기하러 떠났고, 엘투렐은 선전포고를 알리는 뿔 나팔을 불었다. 성 서쪽에는 악마 대가리가 걸렸고, 미끼용 부대가 거대한 사슬을 타고 전진하노라면 도발 당한 악마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두 집단이 부딪치면서 수많은 악마와 엘투렐 병사들이 스틱스강으로 곤두박질쳤다. 망각의 강의 괴물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포식을 기대하는 바로 그 강으로 말이다.


 전투는 몇 날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원정대가 미리 알아둔 지름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동안 미끼용 정찰대는 성으로 귀환했고, 그때부터는 지난한 수성전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수성전은 오랫동안 언데드들을 상대해 왔던 엘투렐에게는 익숙한 전투 방식이었지만, 지칠 줄 모르고 밀려드는 악마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 노련한 엘투렐 군인들에게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나자, 견고할 것만 같던 엘투렐의 방호에도 서서히 구멍이 생겼다.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방호막을 치던 마법사들의 집중력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악마들은 귀신같이 방호막에 생긴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 삿된 것들은 철옹성 같던 하이홀 요새의 방벽을 뒤흔들고,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무수히 많은 화살과 마법탄들이 성벽 너머로 오갔다. 그러는 사이 많은 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었다. 온 도시에 유황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도시는 점점 더 스틱스강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식량창고에도 불이 붙었다. 도시는 절망에 휩싸였다. 원정대가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열흘째 밤이 되자, 필멸자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악마의 노랫소리가 스틱스 강과 엘투렐을 서서히 에워쌌고, 제블로어를 비롯한 가장 용맹한 군인도 그들 앞에 드리운 패전과 죽음의 그림자를 예감했다. 원정대가 떠난 동쪽 사슬 끝에서부터 익숙한 엘투렐식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도시를 스틱스강으로 끌어당기던 거대한 네 개의 사슬이 차례로 끊어지지 않았다면, 도시는 영영 망각과 죽음의 늪에 잠겨 들었으리라. 다행히 티모라는 그들의 편이었다.


 원정대와 자리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도시는 그들을 속박하던 계약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불 꺼진 채 도시 상공을 흉물스럽게 장식하던 인공 태양은 마침내 지옥 강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도시를 사로잡은 사특한 주술이 무용해지자, 엘투렐의 부재를 증명하던 거대한 공동은 주인 도시의 귀환과 함께 메워졌다. 마침내 도시가 부상한 것이다!


 해냈구나!


 도시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제블로어는 그 함성으로 말미암아 그 지난한 싸움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어딘가 개운하지 않았다.




 5. 귀환과 이향 

 

 전쟁은 승리했고, 도시는 귀환했다. 그러나 도시를 할퀴고 지난 끔찍한 재난의 흔적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고, 지옥에서부터 불거진 몇몇 문제들도 지독한 유황 냄새와 함께 남았다. 이를테면 티플링과 비-티플링 시민들 사이의 갈등이 그러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을 기다리고 있던 건 월계관 따위가 아니라, 지독한 모욕과 모함의 장이었다.


 엘투렐이 지상으로 돌아오면서 새롭게 꾸려진 엘투렐 의회는 ‘아베르누스로의 하강’을 야기한 자들에 대한 진상 밝히기에 온 힘을 쏟았다. 끔찍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많은 티플링 민권 운동가들이 지적하듯, 실제로 그 사건의 원흉으로 손꼽힌 것은 자리엘과 계약을 한 당사자들이 아니라, 그 사건과는 전혀 관련 없는 티플링 인사들이었다. 아베르누스 하강 사건 진상 규명 위원회는 그 당시 엘투렐에 팽배했던 ‘티플링 음모론’을 마치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인 것처럼 제기하였다. 이러한 음모론에는  ‘자리엘이 티플링들을 병사로 활용하기 위해 엘투렐을 지옥으로 소환하였다’거나, ‘티플링 악마 내통자가 엘투렐 지도자들을 조종해 아베르누스 대공작과의 계약을 종용하였다’는 내용, 심지어는 ‘제블로어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엘투렐을 이용했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십 년 후에야 밝혀진 바이지만, 그것은 다시금 도시의 영웅으로 떠오른 제블로어를 시기한 세력이 퍼트린 유언비어 중 하나였다.


 의회는 발 빠르게 엘투렐 티플링들에 대한 군중 심판을 열었다. 그런 대규모 심판은 엘투렐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판장에 세워진 백 명이 넘는 티플링들 중에는 제블로어를 비롯한 헬라이더 기사도 있었고,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소서러 아라벨라, 라마지스의 롤란 등의 공통된 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이미 ‘티플링들을 모함하기 위한 장’이었다.


 군중 심판의 주된 심문 내용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법관:  그렇다면 헬라이더들이 자리엘을 도와 지옥으로 ‘말달려 갔다’는 사실을 부정하겠다는 겁니까?


제블로어: 그것은 자리엘의 날개가 아직 어둠에 물들지 않을 적의 이야기요.


법관:  어찌 되었든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군요. 오늘날 헬라이더들이 자리엘의 꾐에 넘어가 그의 병사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아베르누스로의 하강’ 시기, 자리엘의 병사로 전향한 헬라이더들의 사례집을 제시한다.)


제블로어: 일부 헬라이더들의 배신으로 헬라이더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시오? 이 엘투렐을 구하기 위해 사투한 그 기사들을?!


법관: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제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배신자 대부분의 이마엔 흉측한 뿔이 돋아 있었고… … .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일방적인 심문이 이어졌고, 그곳에서, 제블로어는 한때 자기 동료이거나 이웃, 부하였던 자들이 자신을 모함하거나 외면하는 것을 보았다. 비-티플링들, 그것도 종족 차별주의자들로 구성된 재판관들은 재판에 회부된 티플링들 전원의 유죄를 만장일치로 선고하였다. 엘투렐을 위해 헌신한 티플링들을 기다리던 것은 고향 도시의 냉혹한 추방 명령이었다.


 티플링들은 항소심도 없이 추방되었다. 악마들로부터 엘투렐을 보호하던 견고한 엘투렐 성벽은 이제 티플링들과 그들의 고향을 완전히 유리시키는 장벽이 되었고, 삶의 터전을 잃은 티플링들의 곁에 남은 것은 환멸 뿐이었다.


 추방당한 티플링들 사이엔 제블로어도 있었다. 그 엘투렐 성문 앞에서, 그 전직 헬라이더 사령관은 오직 티플링이라는 이유만으로 쫒겨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토록 무결함을 증명해 왔어도 증명되지 못한 동포들의 결백을 보았고, 허락 받아야만 누릴 수 있는 평범함이란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틸시스 등을 비롯한 티플링 난민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그러한 참담함 심경에 대해 종종 토로하곤 했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엇하랴? 그의 앞에는 영원토록 귀향하지 못할 동포들이 있었고, 그 동포들의 시선은 온통 전직 헬라이더 사령관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 늙은 티플링 앞에 놓인 것은 오직 끝 모를 피난길뿐이었다. 그러므로 제블로어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망연함을 감추고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그는 말했다.
 
 “이만 길을 떠납시다, 여러분. 갈 길이 멉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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